이남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744
한자 李南律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기산면 가공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박민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3년 7월 23일연표보기 - 이남률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 이남률 만세 시위 계획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23일 - 이남률 군산보통학교 방화
활동 시기/일시 1919년 5월 24일 - 이남률 「보안법」 위반 및 방화죄로 7년 형 선고
몰년 시기/일시 1950년 4월 21일연표보기 - 이남률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3년연표보기 - 이남률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출생지 이남률 출생지 - 충청남도 서천군 기산면 가공리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이남률 거주지 -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개복동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천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이남률(李南律)[1903~1950]은 1903년 7월 23일 충청남도 서천군 기산면 가공리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이남률은 1919년 서울에서 시작한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할 당시 전라북도 군산 개복동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남률은 1919년 3월 군산에서도 문종묵과 함께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고 군중을 규합하기 시작하였다. 3월 중순 세 차례에 걸쳐 군산 노동조합사무소 및 시내 강호정(江戶町) 등지에서 김군익 등에게 만세 시위에 참가하도록 권유하였다. 이어 3월 17일에는 권재길과 함께 군산영명학교[현 군산제일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시위 참가를 권유하였다. 3월 22일에는 김수남과 함께 일제의 부당한 탄압에 항거하기 위하여 비어 있는 군산공립보통학교[현 군산중앙초등학교]에 방화하기로 계획한 뒤, 3월 23일 준비한 알코올과 솜으로 교사에 불을 붙여 전소시켰다.

이남률은 1919년 5월 24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및 방화죄로 7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고하였으나 1919년 7월 12일 대구복심법원, 9월 27일 고등법원에서 연이어 기각당하여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남률은 1950년 4월 21일 사망하였다.

[묘소]

이남률의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이남률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 3(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 『독립유공자공훈록』 11(국가보훈처, 1994)
  •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판결문」(1919. 5. 24.)
  • 「대구복심법원 판결문」(1919. 7. 12.)
  • 「고등법원 판결문」(1919. 9. 27.)
  • 공훈전자사료관(https://e-gonghun.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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