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714
한자 李商在
영어공식명칭 Yi Sangjae
이칭/별칭 계호(季皓),월남(月南)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박민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51년 10월 26일연표보기 - 이상재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81년 - 이상재 제3차 신사유람단 수행원으로 일본 시찰
활동 시기/일시 1887년 - 이상재 주미외교서기관 근무
활동 시기/일시 1896년 2월 - 이상재 중추원 1등 의관 역임
활동 시기/일시 1896년 7월 - 이상재 독립협회 조직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02년 - 이상재 개혁당 사건으로 징역 15년형 언도
활동 시기/일시 1904년 - 이상재 석방
활동 시기/일시 1904년 - 이상재 대한협동회 조직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1년 - 이상재 황성기독교청년회 총무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이상재 3·1운동으로 3개월 투옥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이상재 조선교육협회를 창설하고 회장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23년 - 이상재 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회를 결성하고 의장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24년 - 이상재 소년척후단 조선총연맹 초대 총재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24년~1927년 - 이상재 조선일보 사장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25년 - 이상재 흥업구락부 초대 회장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27년 - 이상재 신간회 회장 선임
몰년 시기/일시 1927년 3월 29일연표보기 - 이상재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27년 4월 7일 - 이상재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장 거행
추모 시기/일시 1962년연표보기 - 이상재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출생지 종지리 -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지도보기
묘소 이상재 묘소 - 경기도 양주시 삼하리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조선일보 사장|신간회 회장

[정의]

일제 강점기 서천 출신의 독립 운동가.

[가계]

이상재(李商在)[1850~1927]의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자는 계호(季皓), 호는 월남(月南)이다. 아버지는 이희택(李羲宅)이고, 어머니는 밀양 박씨(密陽 朴氏)이다. 부인은 강릉 유씨(江陵 劉氏)이고, 아들은 이승륜(李承倫)·이승인(李承仁)·이승간(李承侃)·이승준(李承俊)이다.

[활동 사항]

이상재는 1850년 10월 26일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에서 태어났다. 1867년 과거 시험에 낙방하였으나 박정양(朴定陽)의 문객이 되었다. 1881년 박정양을 단장으로 한 제3차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이 일본에 파견될 때 수행원이 되어 일본을 시찰하였다. 이후 1887년에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로 부임할 때 주미외교서기관으로 박정양을 수행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888년 말 귀국하였다. 1895년 학부 편집국참서관 등을 거쳐 새로 설립된 관립외국어학교 교장을 지냈고, 1896년 2월 아관파천 직후에는 중추원 1등 의관이 되었다.

이상재는 1896년 7월 서재필(徐載弼)·윤치호(尹致昊)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였고,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 의장을 맡기도 하였다.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 때는 척외(斥外), 황권(皇權) 확립 등 6개 조항을 의결하고 두 차례 상소문을 올렸다. 독립협회가 군주제를 철폐하고 공화제를 수립하려 한다는 이유로 1898년 11월 독립협회 간부들과 함께 일시 체포되기도 하였다. 이후 1902년에는 이른바 개혁당 사건으로 징역 15년형을 언도받고 한성감옥소에 수감되었다. 독립협회에서 지향하였던 입헌군주제를 구현하기 위하여 박정양을 대통령, 윤치호를 부통령, 그리고 이상재 자신을 내부대신으로 하는 공화정부를 수립하려 한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이상재는 1904년 5월에 석방되었는데, 그동안 옥중에서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4년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 반대 투쟁이 거세게 일었을 때, 이상설(李相卨)·이준(李儁) 등과 대한협동회를 조직하여 투쟁에 적극 동참하였다. 1905년 황성기독교청년회 교육부장을 맡아 학관(學館)을 개설하고 국민 계몽을 위한 전국 순회 강연회를 열었다.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에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기독교계 중심인물들이 다수 체포되어 큰 타격을 입게 되었을 때, 이상재는 황성기독교청년회의 총무를 맡아 기독교 사회 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3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윤치호 등과 논의하여 조선교육협회를 창설하고 회장에 피선되었으며, 1923년 3월 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회를 결성하고 의장을 맡아 대학 설립 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쳤으나 일제의 방해와 기금 모금의 부진으로 큰 결실을 거두지 못하였다.

이상재는 1924년 소년척후단 조선총연맹[현 보이스카우트의 전신]의 초대 총재를 지냈고, 1925년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초대 회장이 되었다. 1924년부터 조선일보사 사장을 지내면서 민족 해방을 위한 여러 주장을 펴고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로 인하여 조선총독부의 감시와 통제가 심하여져 발행 정지 처분을 받는 등 큰 시련을 겪기도 하였다. 1927년 1월 민족 협동 전선의 일환으로 창립된 신간회(新幹會)의 회장에 피선되었으나, 두 달 뒤인 3월 29일에 사망하였다.

[묘소]

이상재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이상재가 사망한 뒤 1927년 4월 7일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상재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1986년 서울 종묘공원에 동상이 건립되었고, 고향인 한산면 종지리에는 전시관이 조성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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