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5006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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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孟思誠 |
영어공식명칭 | Maeng Saseong |
이칭/별칭 | 자명(自明),고불(古佛),문정(文貞)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축동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수환 |
[정의]
조선 전기 서천 출신의 문신.
[가계]
맹사성(孟思誠)[1360~1438]의 본관은 신창(新昌)이며,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古佛)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예부전서 맹의(孟義)이고, 할아버지는 이부상서를 지낸 맹유(孟裕)이다. 아버지는 수문전제학을 지낸 맹희도(孟希道)이고, 동생은 맹사겸(孟思謙)이다.
[활동 사항]
맹사성은 1360년(공민왕 9)에 태어났다. 1386년(우왕 12)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후 춘추관검열·전의시승·사인·우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 건국 후에는 예조의랑에 제수되었고, 정종 때 간의좌산기상시를 역임하였다. 1401년(태종 원년)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였고, 1407년 한성부윤을 역임하였다. 1408년 사헌부대사헌이 되었는데, 태종의 사위인 조대임을 보고도 없이 국문하여 왕족을 능멸하였다는 죄목으로 처형될 위기에 처하였으나 영의정 성석린(成石璘) 등의 간언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맹사성은 1411년 판충주목사에 제수되어 관직에 복귀하였고, 1416년 이조참판에 이어 예조판서가 되었다. 1419년(세종 1) 이조판서와 예문관대제학을 역임하였고, 1421년 의정부찬성사가 되었다. 1427년 우의정을 거쳐 1432년 좌의정에 올랐으며, 1435년 나이가 많아서 관직에서 물러나 지내다가 1438년 사망하였다.
맹사성은 청백리뿐 아니라 효자로도 널리 알려졌는데, 1399년 조정에서 효자 정려를 내렸다. 당시 한산군수와 호장이 신창 맹씨 세거지이던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축동리를 ‘효자리(孝子里)’라고 칭하고 효자비를 건립하였다. 맹사성의 효자비각은 아버지 맹희도의 효자비와 함께 축동리 신창 신씨 유허지에 남아 있다.
[학문과 저술]
맹사성은 『태종실록(太宗實錄)』,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 『신찬경제육전(新經濟六典)』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또한 음률에도 조예가 깊어서 고려 가악(嘉樂)을 정리하는 등 조선 초 예악을 정비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묘소]
맹사성의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남구 사직동 산27에 있다.
[상훈과 추모]
맹사성은 사망한 뒤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으며,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행단길 25[중리 300]에 있는 아산맹씨행단 뒤편 세덕사(世德祠)에 위패가 봉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