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 구병희가옥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557
한자 舒川 丘秉喜家屋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유적/건물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시초로182번길 23-1[신곡리 162]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박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18년 - 서천 구병희가옥 안채 건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5년 - 구병희 공덕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933년 - 서천 구병희가옥 사랑채 건립
문화재 지정 일시 2019년 8월 20일연표보기 - 서천 구병희가옥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24호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서천 구병희가옥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변경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4년 5월 17일 - 서천 구병희가옥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로 변경
현 소재지 서천 구병희가옥 - 충청남도 서천군 시초면 시초로 182번길 23-1[신곡리 162]지도보기
성격 가옥
양식 팔작지붕
정면 칸수 7칸[안채]|6칸[사랑채]
측면 칸수 3칸[안채]|2.5칸[사랑채]
소유자 구한승|구용승
관리자 구한승|구용승
문화재 지정 번호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

[정의]

충청남도 서천군 시초면 신곡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가옥.

[개설]

서천 구병희가옥(舒川 丘秉喜家屋)구병희(丘秉喜)[1886~1981]가 살았던 일제 강점기 가옥이다. 구병희는 본관은 평해, 자는 희문이다. 1905년 음서로 경기전참봉의 직책을 받았다. 평해 구씨는 1500년대부터 서천군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구병희는 천석꾼이라고 불릴 정도로 큰 부자였다고 하며 주변의 어려운 지역민을 위한 많은 공헌을 하여 사회적 명망을 얻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세금의 독촉이 잦아지자 1923년부터 1925년까지 구병희가 지역민의 세금을 대신 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에 1925년 시초면민들이 구병희를 기리는 공덕비를 세웠다.

[위치]

서천 구병희가옥은 충청남도 서천군 시초면 시초로 182번길 23-1[신곡리 162]에 있다.

[변천]

서천 구병희가옥은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1918년 지어졌으며, 사랑채는 1933년 지어졌다.

[형태]

안채는 일반 민가에서 쓰지 않은 복잡한 구조이다. 이야기에 따르면 서천의 동헌 건물을 가져와 지었다고도 한다.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단층의 팔작지붕이다. 방과 마루, 주방, 화장실, 부엌, 창고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의 좌측에는 마루와 주방, 우측에는 안방이 있으며 과거 대청마루로 사용한 공간을 나누어 주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랑채는 전통 한옥과 일본식 가옥이 섞여 있다. 정면 6칸, 측면 2.5칸의 몸채와 정면 2칸, 측면 1칸의 날개채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와 마찬가지로 단층의 팔작지붕이다.

[현황]

서천 구병희가옥은 2019년 8월 20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24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변경되었다. 2024년 5월 17일 국가유산청의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에 따라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로 바뀌었다. 서천군의 보수 정비 사업 계획에 따라 문화재 지정 이후 안채와 사랑채의 기둥이 기울어지고 지붕의 기와가 떨어져 나간 것을 해체 보수를 하였다.

[의의와 평가]

서천 구병희가옥은 안채에서는 전통적인 가옥의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볼 수 있고, 사랑채에서는 전통 한옥과 일본식이 절충된 형태가 공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시초면민을 위하여 헌신한 구병희에 대한 사회적 위상과 공덕을 기리는 공간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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