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439
한자 靑年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민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919년 - 3·1운동 발생
전개 시기/일시 1920년 11월 - 서천청년회 창립
전개 시기/일시 1924년 4월 - 마산신진구락부 결성
전개 시기/일시 1926년 8월 22일 - 서남청년회 창립
전개 시기/일시 1929년 9월 21일 - 서천중견청년회 창립
관련 인물/단체 고광규|이영무|서천청년회|서천청년수양회|마산신진구락부|서남청년회|서천중견청년회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천군에서 전개된 청년운동.

[역사적 배경]

일제 강점기 청년은 조선의 현실을 변화시킬 중요한 대안 세력으로 인식되었다. 여러 정치·사회 단체들은 청년들을 전위로 내세워 역사적인 소명을 부여하였다.

[경과]

1919년 3·1운동 이후 각종 사회 운동이 활성화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청년운동(靑年運動) 단체들이 조직되었다. 충청남도 서천군에서도 여러 청년 단체들이 설립되었다. 1920년 11월 서천청년회가 창립되어 주로 교육 운동을 전개하였다. 한글, 산술, 일어 등을 배우는 여름 월모임을 수행하였으며 고광규, 이영무 등이 강의를 담당하였다. 고광규는 민립 대학 설립 운동에 참여하였던 일제 요시찰 인물이었고 이영무는 정미소를 운영하며 중외일보 서천지국 고문을 지낸 유지였다. 1920년대 초 서천군 동면[현 판교면]에서는 서천청년수양회가 조직되어 교육과 강연, 극빈 가정 어린이 지원 등의 활동을 수행하였다. 1924년 4월 마산면 신장리에서는 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체육과 문화 활동을 목적으로 한 마산신진구락부를 결성하였다. 한편 1926년 8월 22일 서남면 사립 옥산보통학교에서 설립된 서남청년회가 위생보급 강연 계획 등을 수립하였다. 이 외 1929년 9월 21일 서천공립보통학교에서 20여 명의 청년들이 서천중견청년회를 창립하였다.

[결과]

충청남도 서천 지역 청년운동은 대체로 실력 양성 운동의 흐름에 있는 교육을 중심으로 한 민족 운동이었다. 학령 아동에 비하여 학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던 서천 지역 현안에도 부합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이후 일제의 탄압 격화와 조선청년총동맹의 해소 논쟁 속에서 공산당 계열 운동을 제외한 영역에서 부문 운동으로서 청년운동은 점차 축소되었다.

[의의와 평가]

일제 강점기 청년운동은 초기부터 사회 운동의 선도적인 역할을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청년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하나의 부문 운동으로 정착되었다. 충청남도 서천군의 청년운동도 지역 사회와 밀착되어 교육 운동, 극빈 가정 지원, 계몽 강연 등의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서천 지역에서의 청년운동은 청년들이 역사적인 소명과 지역 현안 해결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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