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5004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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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民立大學設立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서천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민석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22년 11월 - 조선민립대학기성준비회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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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924년 5월 - 조선총독부 경성제국대학 관제 공포 |
성격 | 항일 운동|교육 운동 |
관련 인물/단체 | 고광규|이상재|조선민립대학기성회 |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천군을 비롯한 한반도 전역에서 실력 양성 운동의 하나로 전개된 대학 설립 운동.
[역사적 배경]
1919년 3·1운동 이후 민족 의식이 고양되었으며 일제는 문화 통치를 실시하였다. 문화 통치 과정에서 실력 양성 운동의 일환으로 민립대학설립운동(民立大學設立運動)이 전개되었다.
[경과]
3·1운동 으로 민족 의식이 고취되며 일제 동화 교육 정책에 관한 항의가 일어났고 민립대학설립운동으로 이어졌다. 민립 대학 설립에 대한 논의는 이상재(李商在), 한규설(韓圭卨), 윤치소(尹致昭) 등 91명의 주도로 1920년 6월 조선교육협회 발기회가 개최되면서 시작되었다. 1922년 11월 이상재, 이승훈(李昇薰), 김성수(金性洙), 송진우(宋鎭禹) 등 47명의 발기인이 참석하여 조선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개최하고 위원장에 이상재, 상무위원에 한용운(韓龍雲), 강인택(姜仁澤), 유성준(兪星濬), 한인봉(韓仁鳳), 이승훈 등을 선출하였다. 1923년 5월 10일 경성지방부를 시작으로 전국에서 지부가 설립되어 기금을 모금하였다. 서천군 출신으로는 고광규(高光圭)와 조병하가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고광규는 1891년 1월 24일 태어났으며 원적은 현재의 충청남도 서천군 시초면 태성리이다. 서천 읍내 서천학교, 경성고등보통학교 부속 교원양성소를 졸업한 이후, 1912년부터 서천공립보통학교에서 훈도로 근무하였다. 1918년 목포공립보통학교로 이임하였고 1919년 퇴직하였다. 1920년 메이지대학 경제과에 입학하였으나 자퇴하였다. 귀국 후 서울에서 서적상을 하던 중 민립대학설립운동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일제는 고광규에 대하여 ‘배일사상을 갖고 있으며, 사람을 선동하고 불온한 행동을 하는 경향이 있음’이라고 기록하였다.
[결과]
일제는 일본의 사립 대학 분교로 조선민립대학을 설립할 것을 수락하였으나, 분교 설치에 관한 조항이 없다는 이유로 수락 결정을 파기하였다. 또한, 조선교육회 임원들에게 민립대학설립운동 중단을 요구하였다. 이후,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인사들을 철저히 감시하였고, 1924년 5월 기금 모금을 위한 지방 강연을 중지시키는 내용의 「경성제국대학 관제」를 공포하여 한국인들의 대학 설립 의지를 약화시켰다.
[의의와 평가]
민립대학설립운동 은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였으나 이후 교육을 바탕으로 한 민족 독립운동의 지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