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평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438
한자 衡平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민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923년 4월 25일 - 형평사 창립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3년 7월 20일 - 서천형평분사 창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6년 4월 29일 - 서천형평청년회 창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6년 5월 1일 - 서천형평야학 창립
성격 신분 해방 운동
관련 인물/단체 홍사균|채성완|서천형평분사|서천형평청년회|서천형평야학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천군에서 전개된 천민 계급의 신분 해방 운동.

[역사적 배경]

천민 계급인 백정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법제상으로는 신분이 해방되었다. 그러나 사회적 차별은 온존하여 교회에서도 교인들이 백정들과 함께 예배할 것을 거부하였고, 행정적으로도 차별받아 호적에 붉은 점으로 표시되었다. 또한 교육 기회도 박탈되어 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으며 입학하더라도 백정임이 밝혀지면 퇴학당하였다. 이에 백정들은 1923년 4월 25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형평사를 설립하여 차별을 철폐하고 사회 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경과]

서천형평분사는 1923년 7월 20일 조직되었으며, 지역 현황을 조사하여 수시로 중앙에 분사의 의견을 전달하였다. 또한, 1926년 4월 29일 서천형평청년회를 설립하고, 1926년 5월 1일 서천형평야학 등을 설립하여 서천에서 실질적인 신분 차별 철폐와 교육 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특히 서천형평야학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초기 야학 활동이 부진하여 서천형평청년회에서는 임시 총회를 열고 15~35세 사원의 전원 입학과 야학 유지를 위한 현물 및 현급 납부를 결의하였다. 이후 야학이 정상화되어 1926년 5월에는 교실 증축이 계획될 정도였다. 당시 교원은 홍사균(洪思均), 채성완(蔡聖完)이었으며 학생 수는 형평사원 20여 명, 비사원 40여 명으로 총 70여 명을 헤아렸고 매일 6~7명씩 증가하는 추세였다.

[결과]

형평사는 '계급 타파, 모욕적 칭호 폐지, 교육 권장, 상호 친목 도모' 등을 내세우며 백정의 차별 철폐를 넘어서는 사회적 과제를 제시하였지만, 1931년 해소 논쟁이 일어나고, 1933년 형평청년전위동맹 사건을 겪으며 세력이 급격히 퇴조하여 경제적인 친목 단체로 변하였다.

[의의와 평가]

형평운동(衡平運動) 은 천민 계급에 대한 사회적 차별 철폐를 추진하는 가운데 전사회적으로 여전히 천대받던 하위 계층의 해방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형평운동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독립운동 방략으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였다. 서천형평분사도 평등의 기조 아래 조직을 개편하여 조직 내 위계를 타파하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