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방사 승려 변란 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418
한자 千方寺 僧侶 變亂 事件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신농길24번길 11[문산면 신농리 34-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장인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664년연표보기 - 천방사 승려 변란 사건 발생
종결 시기/일시 1665년연표보기 - 천방사 승려 변란 사건 종결
발생|시작 장소 천방사 - 충청남도 서천군 문산면 신농길24번길 11[신농리 34-1]지도보기
종결 장소 천방사 - 충청남도 서천군 문산면 신농길24번길 11[신농리 34-1]
성격 변란
관련 인물/단체 이익한|석준|천방사 승려

[정의]

충청남도 서천군 문산면 신농리에서 조선 후기 천방사 승려들이 관아에 저항하며 일으킨 사건.

[개설]

천방사(千方寺)에는 백제 말기 역사와 관련된 전설이 전한다. 당나라의 소정방이 백제를 침공할 때 난관에 봉착하자 천방사를 지어 주어 어려움을 극복하였다는 내용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천방산천방사가 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천방사는 16세기 무렵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위치]

천방사는 충청남도 서천군 문산면 신농길24번길 11[신농리 34-1] 천방산에 있었다. 천방산서천군 판교면, 문산면, 시초면에 걸쳐 있으며 산자락이 넓고 커서 서천 제일의 산으로 불린다.

[경과]

천방사 승려 변란 사건(千方寺 僧侶 變亂 事件) 은 1664년(현종 5) 12월 13일 사건의 경위가 역사에 등장하였다. 『현종실록(顯宗實錄)』을 보면, 충청도 천방사 승려가 관아의 명령을 따르지 않자 감사 이익한이 겸임 한산군수 신숭구에게 우두머리 승려를 잡아들이게 하였다. 이에 당황하고 두려워한 천방사의 승려 수백 명이 조총을 들거나 활을 지니고 험지에 웅거하고 저항하며 절과 벼슬아치의 집에 불을 지르기도 하였다. 이익한은 공주영장 양일한을 보내 승려들을 체포하고 효시할 것을 조정에 청하였다. 1665년(현종 6) 1월 8일 조정에서는 천방사 승려 변란 사건을 엄중히 보고 새로운 감사 김시진을 파견하여 사건을 처리하게 하였다. 김시진은 천방사 승려 우두머리 석준 등 3인을 추가로 체포하고 사건 경위를 조정에 소상히 알렸다. 이에 조정에서는 석준을 수금하여 엄중히 형문하고 나머지 승려들은 죄의 경중에 따라 처리하라고 조치하였다. 1665년(현종 6) 5월 1일 조정에서는 천방사를 중건하지 못하게 하고 옥에 갇혀 있던 승려는 효시하였다.

[결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보면, 1665년 5월 1일 조정에서는 천방사를 중건하지 못하게 하는 조치를 내렸다. 1779년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 금폐(今廢)라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1665년 이후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효종 대에는 천방사가 왕실의 원당(願堂)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652년(효종 3) 효종은 천방사가 궁가의 원당이 되자 천방사의 승려가 위세를 부려 사람들이 가까이 가지 못한다는 보고를 받고, 천방사가 어느 궁가에 속하는지 모르겠으나 사세가 매우 절박한 듯하니 다시 고을에 붙이게 하라는 조치를 내리기도 하였다. 기록을 통하여 당시 천방사의 세력이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천방사 승려 변란 사건 은 조선 후기 원당, 사찰과 지방 관아의 관계를 고찰할 수 있는 변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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