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지교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1323
한자 鍾芝敎會
영어공식명칭 Jongji Presbyterian Church
이칭/별칭 종지장로교회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종단길83번길 2[종지리 249-1]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성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04년 10월 10일연표보기 - 종지교회 설립
최초 설립지 종지교회 -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 260지도보기
현 소재지 종지교회 -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종단길83번길 2[종지리 249-1]지도보기
성격 교회
설립자 이상재|이승인|김영성
전화 041-951-0010

[정의]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에 있는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교회.

[개설]

종지교회(鍾芝敎會)는 계몽 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월남 이상재가 자신의 아들 이승인을 시켜 고향인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에 설립한 교회이다. 종지교회는 기독진신학교를 부설하여 인재 양성에 힘을 쏟는 한편 3·1운동을 주도하는 등 월남 이상재의 유지를 받들어 지역의 민족 계몽과 독립운동에 기여하였다.

[설립 목적]

종지교회이상재 선생의 지식, 신앙, 희망이라는 유지를 받들어 교육을 통한 계몽과 선교를 위하여 설립되었다.

[변천]

1902년 ‘개혁당 사건’으로 아들 이승인과 함께 투옥된 월남 이상재는 감옥에서 기독교인이 되었다. 출감 후 월남은 아들 이승인을 시켜 고향 한산의 종지리에 교회를 세웠다. 1904년 10월 10일이었다.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에 살던 유지 김영성이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 260의 집을 구입하여 교회가 시작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종지교회는 근대 교육을 통하여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대한제국의 정식 인가를 받아, 1909년 8월 6일 기독진신학교를 부설하였다. 기독진신학교는 1917년 3월 2일 폐교될 때까지 지역 인재 양성의 요람으로 역할하였다.

1914년 종지교회유성열을 장로로 임명하였다. 장로 임직과 함께 당회가 구성되고 이듬해부터 전라노회에 정식으로 교회 현황을 보고하는 충청남도 지역 최초의 조직 교회가 되었다. 1917년 당시 보고된 교회의 현황을 보면 선교사, 장로, 장립 집사가 각각 1명씩이고 유년 40명, 세례인 40명에 집회에는 60명 등이 보고되었다.

한편 1919년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나자 유성열 장로는 교인을 포함한 추종자들과 함께 서천의 마산 새 장터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독립 만세 사건으로 인하여 유성열 장로가 투옥되고 교회는 물론 노회까지 탄압을 받게 되었다. 교인들 간의 갈등이 심화되자 유성열 장로가 종지교회를 떠나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면서 갈등 상황이 종결되었다.

종지교회월남 이상재의 자취라고 할 수 있는 이상재 생가는 1950년대에 훼손되었고, ‘ㄱ’자형 교회 건축물은 1960년대 말 철거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종지교회와 서천군은 월남 이상재에 대한 선양 사업을 통하여 이상재의 정신을 계승하자 노력하고 있다. 서천군에서는 1955년 훼손된 월남 이상재의 생가를 1972년과 1980년에 정비 및 복원하였다. 충청남도에서는 1990년 12월 31일 이상재선생생가지를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하였다.

[현황]

종지교회에는 2024년 현재 2002년 부임한 이학준 목사가 시무하고 있다. 농촌 지역에 자리한 종지교회는 오늘날 급속한 인구 감소 현상을 절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남마을도서관, 열린 공부방 지역아동센터, 청소년 꿈터 등 청소년들을 위한 활동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 것은 민족 교육과 선교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던 월남 이상재의 유지를 잇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종지교회월남 이상재의 유지에 따라 설립된 교회이다, 월남 이상재의 민족정신과 신앙이 이식된 토착 교회라고 자부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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