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1311
한자 申石艸
이칭/별칭 신응식(申應植),석초(石艸),석초(石初),신유인(申唯仁)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조경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9년 6월 4일연표보기 - 신석초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22년 - 신석초 한산공립보통학교 3년 편입
수학 시기/일시 1925년 - 신석초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31년 - 신석초 일본 호세이대학 철학과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31년 - 신석초 『중앙일보』에 「문학창작의 고정화에 항하여」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35년 - 신석초 『신조선』 편집인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46년 - 신석초 『석초시집』 발간
활동 시기/일시 1954년 - 신석초 한국일보 입사
활동 시기/일시 1957년 - 신석초 논설위원 겸 문화부장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59년 - 신석초 『바라춤』 발간
활동 시기/일시 1960년 - 신석초 예술원 회원 취득
활동 시기/일시 1965년 - 신석초 한국시인협회 회장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65년 - 신석초 한국문인협회 시분과위원장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69년 - 신석초 대한민국 예술원상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70년 - 신석초 『폭풍의 노래』 발간
활동 시기/일시 1974년 - 신석초 『처용은 말한다』 발간
활동 시기/일시 1974년 - 신석초 『수유동운』 발간
몰년 시기/일시 1975년 3월 8일연표보기 - 신석초 사망
활동 시기/일시 1985년 - 신석초 사후에 『신석초 문학선집』 발간
출생지 신석초 출생지 - 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 활동리지도보기
학교|수학지 한산공립보통학교 -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한마로 48[지현리 182-1]지도보기
학교|수학지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화동
학교|수학지 일본 호세이대학 - 일본 도쿄도 지요다구 후지미
묘소 신석초 묘소 - 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 활동리지도보기
성격 시인
성별
대표 경력 한국문학가협회 중앙위원|예술원 회원|한국시인협회 회장|한국문인협회 시분과위원장

[정의]

충청남도 서천군 출신의 시인.

[가계]

신석초(申石艸)[1909~1975]는 원래 이름은 신응식(申應植)이며, 호는 석초(石艸)·석초(石初), 필명은 신유인(申唯仁)이다. 1909년 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 활동리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신석초는 일찍이 한학을 익혔으며, 1922년 한산공립보통학교[현 한산초등학교]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 검정고시를 거쳐 1925년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병으로 중퇴하였다. 1931년 일본 호세이대학 철학과에 입학한 후 사회주의 영향을 받아 카프(KAPF)[조선프롤레티라아예술가동맹]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발레리에 심취하였다.

신석초는 1931년 ‘신유인(申唯仁)’이라는 이름으로 『중앙일보』에 「문학창작의 고정화(固定化)에 항하여」를 발표하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다. 「문학창작의 고정화에 항하여」는 볼셰비키화한 카프의 창작 방법론에 항의하는 내용이었다. 신석초는 차츰 경직된 이데올로기에 환멸을 느끼다가 카프의 해산과 함께 카프와의 관계를 끊었다. 1935년부터 이육사와 알게 되어 막역한 지기가 되었고, 서정주, 김광균, 윤곤강 등과 함께 1937년 『자오선』 동인으로 참가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하였다. 1935년 『신조선』 편집인으로 활동하였고, 1946년 첫 시집 『석초시집』을 발간하였다. 광복 후 한국문학가협회 중앙위원을 지냈다. 1954년 한국일보에 입사하였으며, 1957년 논설위원 겸 문화부장을 지냈다. 1959년 『바라춤』을 발간하였고, 1960년 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65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시분과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70년 『폭풍의 노래』 등을 펴냈다. 신석초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바라춤」은 전체 45연 427행으로 된 장시이며, 세속과 열반 지향의 삶 사이에서 번뇌를 떨쳐 내지 못하는 화자의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1975년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신석초의 작품으로는 『자오선』 1호에 발표한 「호접(胡蝶)」·「무녀의 춤」, 1939년 『시학』에 발표한 「파초」·「가야금」·「묘」 등이 있다. 『문장』과 『인문평론』이 폐간되자 침묵을 지키며 친일 문학에 동조하기를 거부하였으며, 광복과 더불어 1946년 『석초시집』을 간행하였다. 1959년 『바라춤』, 1970년 『폭풍의 노래』, 1974년 『처용은 말한다』, 『수유동운』을 간행하였다. 신석초 사후 1985년 『신석초 문학선집』이 발간되었다.

[묘소]

신석초의 묘소는 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 활동리 마을 동남쪽 구릉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신석초는 1969년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수상하였다. 2000년 신석초선생시비건립추진위에서 한산모시관 정원에 시 「꽃잎절구」가 새겨진 시비를 건립하였으며, 서천군 화양면 활동리 생가에 생가지 표석을 세웠다. 생가지 앞의 묘지에는 시 「천지(天池)」가 시비로 새겨져 있다.

서천이 낳은 신석초 시인의 문학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하여 ‘신석초 문학상’이 포함된 ‘신석초문학제’가 거행되고 있다. 신석초문학제는 서천문화원이 주최하고 신석초문학제운영위원회가 주관하며, 충청남도, 서천군, 시인 나태주, 고령신씨숭문회가 후원하는 문학제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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