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5008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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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天主敎 |
영어공식명칭 | Catholicism |
이칭/별칭 | 가톨릭,구교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남도 서천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성태 |
[정의]
충청남도 서천군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한 분파.
[개설]
천주교(天主敎)는 국제적으로 ‘보편되다’는 뜻의 가톨릭 교회(Catholic Church)로 불린다. 본래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그리스도교와 동일시되었으나, 11세기에 동방과 서방 교회가 분열되고 16세기에 프로테스탄트가 갈라져 나간 이래로 로마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교회라는 의미로 ‘로만 가톨릭’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는 일단의 유학자들이 이른바 ‘서학(西學)’에 대한 학문적 호기심에서 출발하여 선교사의 활동이 없는 가운데 자발적으로 교리를 수용하였다. 이들이 1784년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천주교회가 설립되었다. 이후 약 한 세기에 이르는 조정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자의 수가 증가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박해기에 발생한 순교자 가운데 1984년에는 103위가, 2014년에는 125위가 교황으로부터 각각 성인(聖人)과 복자(福者)로 선포되었다. 2022년 현재 교적상 등록된 신자는 594만 9862명으로 총 인구 대비 11.3%의 비율을 보이고 있다.
[전래와 발전]
충청남도 서천 지역에 천주교가 전파된 것은 18세기 말로 추정된다. 이른바 ‘진산 사건’으로 야기된 1791년(정조 15) 신해박해 때, 한국 최초의 순교자인 권상연(權尙然) 야고보가 자수하기 전 한산으로 피신하였다고 전하여진다. 그리고 전라도 무장인 최여겸(崔汝謙) 마티아가 처가인 한산에 자주 머물렀는가 하면, 1801년(순조 원년) 신유박해 때 조카인 최수천과 함께 한산에서 붙잡혔다.
초기 천주교회의 유력한 인물들이 같은 지역을 은거지로 삼은 사실로 미루어 서천에는 한국 천주교회 초창기부터 천주교 신앙이 전하여졌을 개연성이 있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이미 견고한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857년에 두 번째 한국인 사제 최양업(崔良業) 신부가 불무골[충청남도 서천군 판교면 흥림리]을 발신처로 하여 서한을 작성하였고, 1858년에는 페롱(S. Ferron) 신부가, 1862년에는 조안노(P. Joanno) 신부가 산막골에 머물며 편지를 보냈다. 1866년에 발발한 병인박해 때에는 한산, 서천, 비인 등지의 신자들이 다수 체포되거나 희생되었다. 선교사들이 서천 지역 등을 자신들의 활동 거점으로 삼은 사실과 많은 순교자 및 희생자가 발생한 사실은 열성적인 신앙 공동체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박해가 종식되고 선교사들의 활동이 자유로워지면서 박해기의 교세가 가장 컸던 충청도 지역에도 신앙 공동체 재건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1890년 합덕성당의 전신인 양촌 본당이 설립되면서 퀴를리에(L. Curlier) 신부가 파견되었다. 지하 교회에서 벗어나 지상의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서천 지역은 합덕성당 퀴를리에 신부의 관할하에 20세기 초까지 14개의 공소가 언급되는 가운데 공소 교우촌이 만들어지고 교세도 크게 확장되었다. 1901년부터는 금사리 본당에 소속되었다가 1936년 서천성당이 본당으로 설립되면서 18세기부터 꿈꾸어 온 이상적인 교회 공동체로 거듭나게 되었다.
2024년 현재 서천, 장항, 서면, 한산 등 4개의 성당과 산막골·작은재 성지에 신부가 파견되어 신앙 역사를 계승하고 있다. 한편, 어매니티 복지마을의 운영은 이웃 사랑에 기초한 천주교회의 가르침을 실현하는 데에 기여하고 있다.
[의의]
천주교 박해기 충청도 선교의 거점 가운데 하나였던 서천 지역은 신앙 자유화 시기를 거치면서 공소와 교우촌을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하여 갔다. 1936년 서천 본당의 설립으로 도약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신도회장이 주도하는 공소도 물론 완전한 공동체이지만, 상주 사제의 파견으로 천주교 전례가 공적으로 집전되고 서천 지역 신자들의 구심점이 됨으로써 서천 본당은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아울러 주임 사제를 통하여 서천 지역의 천주교가 교구 당국과 독립적이고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다.
철도의 부설과 매립 사업, 제련소의 건설 등 서천과 장항이 크게 성장하자 천주교의 선교 활동도 산지의 공소 중심에서 도심으로 범위를 넓혀 갔다. 1943년 장항으로 본당을 이전하였다가 1967년에 서천 본당이 재설립된 상황도 천주교회의 도심 확장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다. 서천성당과 장항성당은 도시로 몰려드는 새로운 신자들을 받아 줄 선교 중심이기도 하였지만 박해기부터 이어진 신앙 유산의 전승지로도 역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