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722
한자 金仁全
영어공식명칭 Gim Injeon
이칭/별칭 경재(鏡齋),경재(經齋),김인옥(金仁玉)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박민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6년 10월 7일연표보기 - 김인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6년 - 김인전 서천 한영학교 설립
수학 시기/일시 1914년 - 김인전 평양신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15년 - 김인전 전주 서문교회 목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5일 - 김인전 군산 만세 시위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3일 - 김인전 전주 만세 시위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김인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21년 - 김인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부의장 피선
활동 시기/일시 1921년 - 김인전 대한민국 임시정부 학무부 차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22년 4월 - 김인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4대 의장 피선
활동 시기/일시 1922년 7월 - 김인전 시사책진회 조직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2년 9월 - 김인전 인성학교 교장에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22년 10월 - 김인전 한국노병회를 결성하고 이사 겸 경리부원으로 활동
몰년 시기/일시 1923년 5월 12일연표보기 - 김인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0년연표보기 - 김인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출생지 지현리 -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지도보기
학교|수학지 평양신학교 - 북한 평양직할시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동작동 산41-2]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장

[정의]

일제 강점기 서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김인전(金仁全)[1876~1923]의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호는 경재(鏡齋, 經齋)이다. 김인옥(金仁玉)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졌다. 아버지는 수원군수를 지낸 개화 지식인으로 이상재(李商在)와 함께 황성기독청년회를 조직하고 계몽운동을 펼쳤던 김규배(金奎培)이다.

[활동 사항]

김인전은 1876년 10월 7일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였으나 아버지의 영향으로 스물일곱 살 때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6년 사재를 들여 서천군 화양면에 신식 한영학교(韓英學校)를 설립하여 구국 교육의 꿈을 폈다. 1910년 한영학교 운영을 작은아버지 김영배에게 맡기고 평양신학교 입학 후 방학 기간에 서천군 화양면 완포리에 교회를 설립하고 장로로 활동하였다.

김인전은 1914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였고, 1915년에 전주 서문교회의 목사로 부임하여 특히 신흥학교(新興學校)와 기전여학교(紀全女學校)의 교사·학생들과 가까이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3월 5일 군산 만세 시위, 3월 13일 전주 남문의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후 일제 경찰의 추적을 피하여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부 비서국장 겸 임시공채관리국장이 되어 독립운동 자금 조달에 노력하였다. 1920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1921년에는 부의장에 피선되었다. 1921년 5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학무부 차장이 되어 상하이 교민 자녀들을 위한 교과서 편찬을 추진하였다. 8월에는 연말에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되는 태평양회의[워싱턴 군축 회담]에 참여할 임시정부 대표단을 지원하기 위하여 조직된 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 재무서기를 맡아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4월 김인전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4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임시정부는 대내외적 환경과 여건이 악화되어 정부 기능이 거의 마비되다시피 한 어려운 형편에 직면하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 소집 문제가 제기되고 있었다. 김인전은 1922년 7월 안창호·신익희·김구·조소앙 등 50여 명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임시의정원과 국민대표회준비위원회 사이에서 일어나는 반목과 갈등을 해소시켜 국민대표회의가 원만히 개최될 수 있도록 여건 조성에 힘썼다. 9월에는 상하이 교민 자녀들의 민족 교육을 담당하던 인성학교(仁成學校) 교장에 취임하여 구국 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태평양회의가 성과 없이 끝난 뒤 독립운동 진영 내에서는 외교 노선에 대한 회의감이 팽배하고 무장 투쟁 노선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대두하였다. 1922년 10월 김인전은 김구·손정도 등과 함께 노병일치(勞兵一致)를 원칙으로 10년 이내 1만 명 이상의 노병(勞兵) 양성과 100만 원 이상의 전비(戰費) 조성을 목표로 하는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결성하고 이사 겸 경리부원을 맡았다. 김인전은 국민대표회의에 전라북도 대표로 참석하던 중 병세가 악화되어 1923년 5월 12일 사망하였다.

[묘소]

김인전의 묘소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동작동 산41-2]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김인전의 공적을 기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중화산동1가 150-3 다가공원 내에 1986년 김인전목사기념비가 건립되었고, 2004년 서천군 화양면 와초리의 옛 한영학교 부지 인근에 경재김인전선생추모비가 건립되었다. 서천군 마서면 도삼리금강 하구에 조성된 김인전공원 안에 김인전의 흉상이 건립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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