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721
한자 金仁愛
이칭/별칭 최기물(崔氣物)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 와초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박민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8년 3월 6일연표보기 - 김인애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19년 - 김인애 기전여학교 재학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3일 - 김인애 전주 남문 밖 시장 및 전주우편국 주변 만세 시위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6월 30일 - 김인애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집행 유예 3년 선고
몰년 시기/일시 1970년 11월 20일연표보기 - 김인애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9년연표보기 - 김인애 대통령표창 추서
출생지 김인애 출생지 - 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 와초리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김인애 거주지 - 전라북도 전주군 전주면 화산동
학교|수학지 기전여학교 -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유연로 133[효자동3가 393]
활동지 전주 남문 밖 시장 및 전주우편국 주변 -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천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김인애(金仁愛)[1898~1970]는 1898년 3월 6일 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 와초리에서 태어났다. 다른 이름은 최기물(崔氣物)이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초 전주 지역에 「독립 선언서」가 전달되자 기전여학교[현 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와 신흥학교[현 전주신흥고등학교] 등 기독교 계열 학교 학생들과 천도교도가 주축이 되어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김인애는 1919년 당시 전라북도 전주군 전주면 화산동에 거주하면서, 기전여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거사 당일인 3월 13일 김인애는 전주 남문 밖 장터 부근에서 기전여학교 학생인 임영신·최애경 등과 함께 시위에 참여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3월 13일은 장날이었기 때문에 수백 명이 참가하였고, 시위대의 행렬은 전주 남문을 거쳐 시내의 전주우편국 부근까지 이어졌다. 결국 시위대 해산에 돌입한 경찰에 의하여 시위에 참여한 인물 40여 명과 함께 피체되었다.

김인애는 동지들과 함께 유치장으로 들어가면서도 “독립 만세”를 외쳤고, 수감 중에는 단식으로 항거하기도 하였다. 일본인 검사가 위압적인 자세로 복종할 것을 강요하자, “너희는 우리의 강토를 강탈하고 우리의 부형을 학살한 강도이거늘 도리어 삼천리강산의 주인이 되려는 우리를 비법이라 하니 이는 비법한 판결이다.”라고 성토하였다. 김인애는 1919년 6월 30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집행 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19년 9월 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70년 11월 20일 사망하였다.

[묘소]

김인애의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김인애의 공훈을 기리어 2009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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