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5007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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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池繼漼 |
영어공식명칭 | Ji Gyechoe |
이칭/별칭 | 언숙(彦叔),충성군(忠城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남도 서천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근호 |
[정의]
조선 후기 서천 출신의 무신.
[가계]
지계최(池繼漼)[1594~1637]의 본관은 충주(忠州)이며, 자는 언숙(彦叔), 호는 표곡(豹谷)이다.
[활동 사항]
지계최는 1594년(선조 27) 서천에서 태어났다. 1623년(인조 원년) 의병 800명을 이끌고 관서행영의 도원수 장만(張晩)의 휘하에 들어가 서로소모별장이 되었다. 1624년 부원수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킨 뒤 강적(姜適)을 지계최에게 보내 가담할 것을 종용하였지만 지계최는 이를 거부하고 강적의 목을 베었다. 이후 군사를 이끌고 한양으로 달려갔으나 왕은 공주로 피난한 뒤였으며 이괄이 한양을 점령 중이었다. 지계최는 군사를 사현(沙峴)에 주둔시켰다가 반란군과 싸워서 승리하였으며, 난이 진압된 후 진무공신 3등에 녹훈되고 충성군(忠城君)에 책봉되었다.
지계최는 1631년 희천군수를 역임하였고, 이후 서흥부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서흥 검수참(劍水站)에서 청나라 군대와 싸워 수백 명의 적을 베었으나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더 싸울 수 없게 되자 지계최는 부장 몇 명만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향하였고, 지금의 황해도 신계군(新溪郡)에서 적에게 포위되어 사로잡힐 위기에 처하자 자결하였다.
[학문과 저술]
1933년에 지계최의 10대손인 지응현(池應鉉)이 지계최의 행적을 기록한 『표곡실기(豹谷實紀)』를 간행하였다.
[상훈과 추모]
지계최는 사망한 뒤 한성부판윤에 추증되었고, 1881년(고종 18) 충신으로 정려되고 지금의 서천군 판교면 후동리에 충신문이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