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5006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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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山甫 |
영어공식명칭 | Yi Sanbo |
이칭/별칭 | 중거(仲擧),명곡(鳴谷),충간(忠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남도 서천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근호 |
[정의]
조선 전기 서천 지역에 거주하였던 문신.
[가계]
이산보(李山甫)[1539~1594]의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자는 중거(仲擧), 호는 명곡(鳴谷)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장윤(李長潤)이고, 할아버지는 이치(李穉)이다. 아버지는 이지무(李之茂)이고, 어머니는 구승유(具承裕)의 딸 능성 구씨(綾城 具氏)이다. 부인은 이창(李𢠵)의 딸 덕수 이씨(德水 李氏)이다.
[활동 사항]
이산보는 1539년(중종 34) 지금의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에서 태어나 작은아버지 이지함(李之菡)에게 학문을 배웠다. 1567년(선조 즉위년)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568년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예문관의 검열·봉교·대교를 거쳐 1571년 성균관전적이 되었고, 예조좌랑에 제수되어서는 부모 봉양을 위하여 외직으로 나가기를 요청하여 해미현감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사간원정언을 거쳐 병조좌랑이 되었으나 어머니가 사망하여 보령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산보는 상례를 마친 뒤 병조정랑에 제수되고 함경도에 어사로 파견되었으며, 1576년 이조정랑에 제수되었다. 1577년 양어머니가 사망하여 서천 지역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이때 명곡정사(鳴谷精舍)를 짓고 강학하였다. 양어머니의 상례를 마친 뒤 성균관전적·의정부사인·사헌부집의 등을 거쳐 홍문관의 응교·전한·직제학을 역임하였으며, 1583년 종부시정을 거쳐 승정원승지가 되었다.
이산보는 1585년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였고, 형조참판·예조참판·한성부좌윤·한성부우윤을 거쳐 1588년에는 황해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1589년 사간원대사간에 제수되었고, 1590년에는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선조를 호종하면서 이조참판·이조판서 등을 지냈고, 도검찰사로 임명되어 지방민의 안정에 주력하였다. 의정부좌참찬에 제수되어서는 세자를 호종하여 전주(全州)에 내려왔다가 홍양(洪陽)으로 가서 생활하였다. 이산보는 1594년 사망하였다.
[묘소]
이산보의 묘소는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이산보는 사망한 뒤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 2등에 녹훈되었고, 영의정과 한흥부원군(韓興府院君)에 추증되었다. 1633년(인조 11)에는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으며, 서천에 있던 건암서원(建巖書院)과 지금의 보령시 죽성로 411[장산리 산27-1]에 있는 화암서원(花巖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