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목은선생문집판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451
한자 稼亭牧隱先生文集版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물/유물(일반)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기산면 서원로172번길 66[영모리 10]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경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작 시기/일시 1364년연표보기 - 『가정집』 간행
제작 시기/일시 1404년연표보기 - 『목은집』 간행
문화재 지정 일시 1978년 3월 31일연표보기 - 가정목은선생문집판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77호 지정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91년 - 가정목은선생문집판 180판 도난
관련 사항 시기/일시 2007년 - 가정목은선생문집판 41판 회수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가정목은선생문집판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변경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4년 5월 17일 - 가정목은선생문집판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변경
현 소장처 문헌서원 - 충청남도 서천군 기산면 서원로172번길 66[영모리 10]지도보기
성격 목판각류
재질 나무
크기(높이,길이,너비) 975판
소유자 문헌서원
관리자 문헌서원
문화재 지정 번호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

[정의]

충청남도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문헌서원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 후기 책판.

[개설]

가정목은선생문집판(稼亭牧隱先生文集版) 은 충청남도 서천군 출신인 고려 후기의 성리학자 가정(稼亭) 이곡(李穀)[1298~1351]과 아들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의 시문집을 간행하기 위하여 제작한 목재 책판이다. 이곡은 고려 후기 한산군(韓山郡) 향리의 아들로 태어나 20세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36세에는 원나라 연경(燕京)에서 실시된 제과에 급제하여 한림국사원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에 임명되었다. 아들 이색 역시 26세에 고려에서 실시한 과거에 급제한 후 27세에는 원나라의 회시와 전시에 합격하면서 응봉한림문자승사랑 동지제고 겸 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承仕郞 同知製誥 兼 國史院編修官)에 임명되었다. 이곡이색 부자는 모두 고려와 원나라의 과거에 합격하고 관직을 부여받았다.

[형태]

가정목은선생문집판 은 목판으로 제작되었으며, 총 975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위치]

가정목은선생문집판 은 충청남도 서천군 기산면 서원로172번길 66[영모리 10] 문헌서원 장판각에 소장되어 있다.

[특징]

이곡의 문집이었던 『가정집』은 1364년 이색에 의하여 편집되었고, 이곡의 사위였던 박상충이 간행하였다. 그리고 60여 년 후 1422년 이곡의 손자 이종선이 다시 간행하였으며, 1635년 이곡의 후손 이기조가 경상감사에 재직할 때 대구에서 재간행하였다. 하지만 해당 판본들은 모두 전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가정집(稼亭集)』은 1662년 이곡의 후손 이태연이 전라감사에 재직하면서 전주에서 간행하였던 판본인데, 4책 2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목은집(牧隱集)』은 『목은시고(牧隱詩藁)』와 『목은문고(牧隱文藁)』를 합친 문집이며, 1404년 아들 이종선에 의하여 처음 간행되었다. 1484년 이색의 후손 이봉은 자신의 아버지 이계전이 편찬하였던 시구 『목은시정선(牧隱詩精選)』을 간행하였고 1583년 이색의 7세손 이증은 『문고(文藁)』를 간행하였다. 해당 판본들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거의 사라졌는데, 1626년 이색의 10대손 이덕수가 『목은집』을 새롭게 간행하였다. 현존하는 『목은집』은 55권 25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황]

가정목은선생문집판 은 1978년 3월 31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77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변경되었다. 2024년 5월 17일 국가유산청의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에 따라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바뀌었다.

가정목은선생문집판 은 975판으로 문헌서원에 보관되었는데, 1991년 180판을 도난당하였다. 이후 2007년 도난당한 180판 중 41판을 되찾았다.

[의의와 평가]

『가정집』과 『목은집』은 고려 후기~조선 전기 시기 한국인 학자의 한문학, 성리학 수준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문집을 간행하기 위하여 목판각을 여러 차례 만들었던 것은 조선의 활자 인쇄술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 의미를 갖는다. 또한 당시 조선에서 학문적 계승을 꾸준히 추구하였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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