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등기소 학살 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447
한자 舒川登記所 虐殺 事件
이칭/별칭 서천등기소 창고 사건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민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9월 27일연표보기 - 서천등기소 학살 사건 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8년 - 서천등기소 학살 사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진실 규명
성격 6·25전쟁 시기 북한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

[정의]

1950년 9월 27일 북한군이 충청남도 서천군 서천읍 군사리서천등기소에 수감되어 있던 우익 인사들을 학살한 사건.

[역사적 배경]

6·25전쟁 중에 남북한은 수많은 민간인 학살을 자행하였다. 국군은 국민보도연맹사건을 비롯하여 부역자 색출 등의 명목으로 민간인을 학살하였고, 인민군은 주로 우익 인사와 군경, 지주 및 지주의 가족들을 학살하였다. 서천등기소 학살 사건은 인천 상륙 작전 이후 후퇴하던 북한군이 서천군에서 자행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서천등기소 창고 사건’이라고도 한다.

[경과]

북한은 1950년 7월 22일 ‘전시 조건 하에서 발생하는 범죄에 대해서 형법 적용에 관한 지도적 지시’, 1950년 8월 21일 ‘군사행동 구역에서의 군사재판소에 관한 규정’ 등을 발표하며 민간인 학살의 근거를 마련하였다. 주로 공무원, 경찰, 지주 등이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북한군 남침 후 미처 피난 가지 못한 소방대장 양경모, 서면 면 서기 한갑수를 비롯하여 대한청년단원, 경찰, 공무원, 학생 등 280여 명의 서천 지역 주민들이 서천등기소 창고에 수감되었다. 1950년 9월 27일 북한군은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후퇴하기 전 서천등기소 창고를 불태워 수감자들을 학살하였다. 희생된 이들은 1950년 9월 중순 체포되었으나 풀려난 후 1950년 9월 25일 다시 체포되어 희생되었다. 두드러진 반공 활동을 한 우익 인사들은 7월부터 수감되어 있다가 학살당하였다. 서천경찰서 기록과 주민 구술을 종합하면 희생자 수는 240~250명 정도이다. 학살을 주도한 이들은 서천군 노동당위원장, 인민위원장, 정치보위부장 등이었으며 이후 빨치산이 되거나 체포되어 사형당하기도 하였다. 이외에 감옥에서 병사한 이도 있으며 행방이 밝혀지지 않은 이도 있다.

[결과]

2006년 박성열 등 48명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와 서천군청서천등기소 학살 사건의 진실 규명을 요구하였다.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유엔군의 인천 상륙으로 인민군의 전세가 불리해진 상황에서 북한 노동당의 지시에 따라 서천 지역 좌익에 의하여 집단 학살이 이루어졌다.”고 밝히며 “경찰과 국군의 가족이나 대한청년단 등 우익 단체 인사들이 희생자들이며 반공 활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희생되었다.”라고 설명하였다.

[의의와 평가]

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은 이데올로기 대립의 결과였다. 1947년 3월 1일 촉발된 제주4·3항쟁과 1948년 10월 19일 발생한 여수 순천 10·19 사건부터 시작된 좌·우익 상호 학살은 국가가 주도하는 집단 학살의 양상을 띠었다. 서천등기소 학살 사건은 이같은 집단 학살이 한반도 전역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 주는 사례이며, 부당한 국가 폭력과 상호 학살의 역사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교훈을 담은 사건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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