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5004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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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倡義團 事件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서천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민석 |
전개 시기/일시 | 1925년 9월 - 창의단원 정원득 다이너마이트, 뇌관, 도하선 등을 빼돌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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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시기/일시 | 1926년 3월 1일 - 창의단원 정원득과 김응선 경성 지역 관공서 폭파 계획 수립 |
종결 시기/일시 | 1926년 7월 - 창의단원 정원득과 김응선 일제 경찰에 체포 |
성격 | 독립운동 |
관련 인물/단체 | 창의단|정원득|전좌한|김응선 |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천군 종천면 지석리에 거주하던 정원득 등이 참여하여 일제 식민 통치 기관을 파괴하고자 한 사건.
[역사적 배경]
창의단(倡義團)은 만주 북간도와 함경도를 세력권으로 활동하는 이범모가 단장인 독립운동 단체로 러시아 연해주 지역 이범윤 계열 독립군이다. 단원은 1,000명에 이르렀으며 각 지역에서 독립운동과 의열 투쟁을 전개하였다.
[경과]
1925년 항일 운동 전력이 있는 전좌한과 김응선은 일제 통치 기관을 파괴할 목적으로 김응선의 매제이며 충청남도 서천군 종천면 지석리에 거주하던 정원득과 함께 모의하여 폭탄을 제조하였다. 정원득은 서천 수리조합 공사장[현 서부저수지]에서 발파 작업을 담당하며 1925년 9월 다이너마이트와 뇌관, 도화선 등을 빼돌렸다. 김응선과 전좌한은 이후 창의단원인 계의산을 만나 창의단원으로 가입하였다. 그리고 조선총독부, 경성부청, 조선신궁, 조선은행, 종로경찰서 등을 파괴하고자 하였으나 일제 헌병대의 탐지로 실패하였다. 이로 인하여 김응선과 계의산, 전좌한 등이 만주로 망명하고 송암우, 김운용, 정명옥 등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정원득과 김응선은 다시 1926년 3월 1일 경성 지역 관공서 폭파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실패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창의단을 재건하였다. 이후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하였으나 7월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결과]
1927년 8월 3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정원득은 징역 4개월과 집행 유예 1년을 선고받고, 김응선은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정원득에게 201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고, 김응선에게 1968년 대통령 표창, 1991년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의의와 평가]
1920년대는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의열 투쟁이 벌어지던 시기였다. 의열 투쟁의 수단인 암살과 파괴는 뚜렷한 목적과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 창의단 사건은 국내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의열 투쟁이 창의단과 만난 사례이고, 한 차례 실패에도 불구하고 구성원들이 모두 체포될 때까지 끈질기게 투쟁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