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5003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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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龍堂津祠 |
이칭/별칭 | 웅진명소(熊津溟所),상조음거서(上助音居西)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원수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오치훈 |
[정의]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원수리 용당산에 있었던 조선 시대 사당.
[제정 경위 및 목적]
용당진사(龍堂津祠)는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국가의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관련 기록]
용당진사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잡지 제사조에 중사(中祀)의 대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지금의 서천에 해당하는 서림군에 있던 상조음거서(上助音居西)이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서천군조에 “웅진명소, 봄가을에 소재관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한다.”라고 되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용당진사, 군의 남쪽 24리[약 9.6㎞]에 있다. 고려 시대에 웅진명소(熊津溟所)라고 하였으며 향과 축문을 내렸다. 지금은 본 읍에서 제사를 지낸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고려 시대 이곡(李穀)이 남긴 시 「서주 용당과 장암의 두 사당을 지나며[過西州龍堂長岩二祠]」에서 당시에도 ‘용당’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내용]
용당진사는 서천군 치소에서 남쪽으로 24리 떨어져 있었으며, 『세종실록지리지』를 편찬할 당시의 명칭은 웅진명소였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용당진사로 기록되어 있어, 15세기 전반에 변화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용당진사에서는 일찍이 신라 때부터 제사가 행하여졌으며 고려 시대에도 변함이 없었다. 용당진사의 위치는 장항읍 원수리 용당산 일대로 추정되는데, 용당산 일대는 금강 하구에 인접하여서 조운선과 상선 등이 수시로 드나드는 포구였다. 이런 점으로 보아 용당진사는 강과 바다를 오가는 선박들의 무사 항해를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는 영험한 공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서 명산대천 등에 지내는 제사를 모두 혁파하여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지만, 1429년(세종 11) 예조의 건의에 따라 용당진사에서도 국가적으로 제를 올리게 되었다. 제사는 매년 2·5·8·11월의 길일에 국고의 미곡으로 치르게 하고, 제사 뒤에는 감사가 예조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1437년(세종 19)에는 예조에서 악(嶽)·해(海)·독(瀆)·산천의 제단, 사당, 위패 등을 정하면서 위판에는 ‘웅진명소지신(熊津溟所之神)’이라고 쓰도록 정하였다.
[의의와 평가]
용당진사는 서천 지역의 대표적인 제사처이며, 삼국 시대 이래로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내며 풍요와 평안을 기원하던 한민족의 의식을 잘 보여 주는 공간이다. 특히 금강 하구에 있어 왕래하는 선박의 무사 항해를 기원하였다는 점에서 금강 지역의 독특한 신앙생활을 반영하는 유적지로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