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5003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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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白江戰鬪 |
이칭/별칭 | 백촌강전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서천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김기섭 |
[정의]
663년 8월 충청남도 서천군 일대 백강 어귀에서 나당 연합군이 백제 부흥군과 합세한 왜의 수군을 크게 격파한 전투.
[개설]
백강전투(白江戰鬪) 는 백제 부흥군을 돕기 위하여 바다를 건너온 왜군과 합세한 백제 부흥군이 나당 연합군과 벌인 전투이다. 왜군 1만 명이 탄 군선 1,000척과 당나라 군선 170척이 663년 8월 27~8월 28일 이틀에 걸쳐 백강 어귀에서 4차례 맞붙어 싸워 왜의 군선 400척이 불타고 많은 병사가 사망하였다. 왜군의 패배를 지켜본 백제 부흥군의 부여풍은 측근과 함께 고구려로 도망갔으며, 이어 백제 부흥군의 근거지인 주류성(周留城)도 나당 연합군에게 함락되었다. 백강(白江)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등에 기록된 강 이름이다. 정확한 위치에 대하여서는 금강설, 동진강설, 안성천 하구설 등이 있는데, 전투가 벌어진 곳은 대체로 충청남도 서천군 일대의 금강 하구로 추정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백강이 백촌강(白村江)으로 나와 일본 학계는 ‘백촌강전투’라고 부른다.
[역사적 배경]
660년 7월 백제 의자왕이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게 항복한 뒤 9월 백성 1만 2800여 명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감으로써 백제는 공식적으로 멸망하였다. 하지만 백제 사람들은 임존성(任存城)과 주류성을 중심으로 부흥 운동을 강력하게 이어 갔다. 처음에는 무왕의 조카로 알려진 귀실복신(鬼室福信)과 승려 도침(道琛)이 함께 백제 부흥군을 이끌었으며, 얼마 뒤 귀실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권력을 독점하면서 왜에 머물고 있던 백제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세웠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왜의 텐지천황[天智天皇]이 662년 봄 정월 27일 화살 10만 척(隻), 실 500근(斤), 솜 1,000근, 베 1,000단(端), 가죽 1,000장(張), 벼 3,000곡(斛)을 백제 좌평 귀실복신에게 주고, 3월 베 300단을 백제 왕에게 주었다는 기록과 662년 5월 백제로 수군 170척(艘)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663년 3월 왜군 2만 7000명을 백제로 보냈다고 한다. 이어서 663년 8월 왜의 장수 이호하라노 기미오미[盧原君臣]가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오니, 백제 부흥군의 풍왕이 백강 어귀로 나가 맞이하였다고 한다.
[경과]
663년 6월경 백제 부흥군에서는 또 분란이 일어나 부여풍이 복신을 잡아 처형하였다. 그러자 신라의 문무왕이 직접 나서는 등 나당 연합군의 총공격이 개시되었다. 8월 중순 신라군이 중심이 된 연합군이 주류성을 포위 공격하였으며, 8월 27일부터 백강 어귀에서는 당의 수군 170척[7,000명]과 왜의 수군 1,000척[1만 명]이 맞붙어 싸우는 큰 전투가 벌어졌다. 『삼국사기』, 『구당서』, 『일본서기』 등에 따르면, 유인궤가 이끄는 당나라군이 백강 어귀에서 부여풍의 군대를 만나 4번 싸워 모두 승리하였다. 당나라군이 왜군의 배 400척을 불태우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붉게 하고 바닷물도 붉어졌다”라고 할 정도로 왜군이 크게 패하였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671년(문무왕 11) 신라와 당나라가 전쟁을 벌이던 중 문무왕이 당나라 총관 설인귀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 실려 있는데, “왜의 수군이 백제를 도우러 와서, 왜의 배 1,000척은 백강에 정박하여 있고, 백제의 정예 기병이 언덕 위에서 배를 지키고 있었는데, 신라의 용맹한 기병이 중국 군사의 선봉이 되어 먼저 언덕의 진지를 깨뜨리니 주류성에서는 간담이 서늘하여져 곧바로 항복하였다”라고 한다.
[결과]
백강전투 에서 왜군이 패배하자 부여풍은 고구려로 도망갔으며, 왜군은 백제 부흥군의 본거지인 주류성마저 함락된 뒤 남은 병력과 백제 유민들을 배에 태우고 왜로 돌아갔다.
[의의와 평가]
백강전투 를 끝으로 백제인들의 왕조 부흥 운동은 힘을 잃었으며, 의자왕이 항복한 이후에도 백제 왕조가 멸망하였음을 인정하지 않고 부흥 운동군을 강력히 지원하여 온 왜도 지원 활동을 더 이상 이어 가지 않았다. 이로써 3년에 걸친 백제의 부흥 운동이 실패하고 백제 왕조가 마침내 멸망하였음을 백제인들과 지원 세력들이 모두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백강전투는 백제의 구원군으로서 왜의 존재감을 국제 사회에 각인시켰다. 그리고 백강전투가 끝난 뒤 왜의 남은 병사들과 함께 백제 유민들 중 상당수가 왜로 건너갔는데, 이러한 사실은 왜에서 신라를 적국으로 인식하고 왜곡된 역사관을 만드는 데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신라가 왜를 경계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왜에서는 한동안 국방상의 위기 의식이 고조되어 주요 교통로에 백제식 산성을 축조하였으며, 각종 개혁 정책을 서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