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500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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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서천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범 |
[정의]
충청남도 서천군 출신의 민족 지도자 이상재에 대한 이야기.
[월남 이상재에 대한 우리들의 기억]
1957년 6월 28일, 월남 이상재에 대한 묘비 제막식이 있었다. 제막식은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에서 거행되었다. 당시 참석자로는 대통령 이승만을 비롯하여 민의원 의장과 대법원장 등 정부의 주요 요인들의 거의 모두 참여하였다. 충청남도 선영의 유해가 30년 만에 양주로 옮겨지면서 동시에 묘비도 세우고 기념식도 개최하게 된 것이다. 월남 이상재는 1950년대 제1공화국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좌파와 우파로부터 모두 존경받던 그러한 인물이라는 것을 묘비 제막식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었다. 월남 이상재가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어떻게 정치적으로 성격이 다른 두 집단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을까. 월남 이상재가 한국의 역사에 남긴 흔적이 매우 컸다는 것을 알려준다.
월남 이상재의 일생은 중층적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월남 이상재는 여러가지 역사의 변환기를 경험하였다. 아편전쟁, 청일전쟁, 의화단 운동, 러일전쟁의 여파와 더불어 서구의 근대화를 받아들여야 했다. 월남 이상재의 세계관은 그러한 과정 속에서 형성되었다. ‘월남 이상재’ 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근대 교육자, 종교 운동가. 민권 운동가 등이다. 처음부터 근대적인 사상에 스며든 그러한 인물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유학을 공부하면서 전형적인 사대부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다 인생 후반에 기독교에 귀의하였다. 유학에서 기독교로의 전환은 당시 어려운 일이었다. 유학을 공부하는 것은 세계관을 통찰하는 철학적 사유 체계의 완성을 위한 과정이었다. 그러한 인물이 기독교도로 바뀌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월남 이상재의 삶이 펼쳐지던 시기는 제국주의 세력이 몰려오고 청국과 일본이 동북아의 패권을 다투던 시기였다. 유교적 문화의 이상이 서양 기계 문명의 질주 속에 절망하던 시기였다. 모든 내면의 가치관은 서양인의 주도로 변화되었다. 서구적 가치관이 득세하던 시기였다.
이상재는 조선 왕조의 사대부에서 개화파 관료로, 미국 주재 외교관으로, 사회단체의 수장으로서 국내와 국외를 오가면서 매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역할이 이렇게 변화한 것은 월남 이상재의 삶이 시대상을 반영한 결과였다. 월남 이상재는 관료의 삶을 선택하거나, 친일의 길로 들어서거나, 식민지의 안락한 삶에 타협하지 않았고, 시대가 바라고 시대가 필요로 하는 위치에 항상 있었다. 그것이 바로 유학자, 관료, 외교관, 사회 지도자로 이어지는 삶의 여정인 셈이다. 그동안 월남 이상재는 독립운동가로서의 이미지만 가지고 있었다. 이에 월남 이상재의 삶을 단순하게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월남 이상재는 매우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월남 이상재의 삶과 이력]
월남 이상재는 1850년(철종 1) 11월 21일, 충청남도 한산군 부북면 종지리[현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에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산 이씨 이희택이었고 어머니는 밀양 박씨였다. 충청 문화의 숭유로 일컬어지는 한산 이씨 이색의 16대손으로 자랐다. 월남 이상재는 7세부터 서당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월남 이상재도 처음에는 과거 시험 준비를 하였고, 18세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말았다. 이에 월남 이상재의 아버지는 박정양을 찾아가도록 하였다. 박정양과의 만남은 월남 이상재의 삶을 모두 바꾸어 놓았다. 이상재는 존왕양이를 내세우는 분위기 속에서 개화 정책으로의 사상적 전환을 하게 된 것이다. 동서문화의 이념을 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상재와 박정양은 9살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박정양을 수행하면서 일본시찰단의 수행원으로 참여하거나 주미공사관에 근무하면서 세계관의 전환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박정양이 관직을 역임하는 동안 이상재는 박정양의 수행원이나 혹은 박정양과 관련된 부서의 수장을 맡으면서 관직 생활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박정양이 기기국 총판이 되자 이상재는 인천 우정국주사가 되었고, 박정양이 주미공사가 되자 서기관이 되었으며, 박정양이 전환국관리가 되자 전환국위원이 되었다. 박정양이 학무아문 대신이 되자 이상재는 학무아문의 참의와 학무국장을 지냈고, 박정양이 내각총리대신이 되자 외국어학교장이 되었다. 모두 이상재가 박정양의 최측근이라는 것을 말하여 준다. 특히 외국과의 교류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박정양이 일본보빙사로 파견되었을 때 함께 수행원이 되었다. 박정양 또한 이상재의 일에 적극적으로 후원을 하였다. 이상재가 주관하던 독립협회의 관민공동회 강령을 고종에게 보고한 사람이 바로 박정양이었다. 독립협회는 유학자인 이상재와 기독교인인 서재필이 의기투합하여 만든 단체였다. 독립협회를 기점으로 이상재는 점차 사회 운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적극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연단에 올라 시정을 논설하고 대한제국의 국정 개혁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박정양이 을사조약 이후 은퇴를 하자 이상재도 함께 정계 활동을 중지하고 사회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박정양과 이상재는 자신들의 삶을 함께 하고 있던 것이다.
[월남 이상재의 세계관과 외교]
이상재는 유학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세계관에 자극을 주고 외교적 능력이 발휘된 시기는 바로 미국 워싱턴 주재 공사관에 파견된 때였다. 조선 왕조가 해외에 외교를 위하여 처음으로 파견된 공식 사절단이 바로 미국에 파견된 공사관이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제22대 클리블랜드였다. 클리블랜드의 공식 환영을 받으며 조선의 공사관원들은 워싱턴에 도착하였다. 당시 조선 왕실의 외교고문이었던 데미와 주미공사관 서기관 알렌의 도움으로 이상재는 외교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당시 미국은 청의 간섭을 방지할 목적으로 제물포에서 나가사키로 이동할 때 미국 전함을 파견하여 편의를 제공하였다. 이상재를 포함한 조선의 사절단들은 증기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 고종의 국서를 올리고자 관복 차림으로 미국 대통령을 알현하였다. 당시 이상재는 서기관의 신분으로 미국 대통령 클리블랜드를 만났다. 이상재는 전형적인 조선 왕조의 고위 관료의 복장으로 대통령 관저에 들어갔다. 이상재는 박정양이 서울에서 출발할 때도, 박정양이 귀국할 때도 함께 모든 일정을 따랐다.
이상재가 주미공사 박정양을 수행하면서 당시의 소회가 1926년 잡지에 게재된 적이 있다. 당시 조선 왕조에서 외국이라고 한다면 청국과 일본 및 몇 개 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외교의 경험이 없었으며 외교관을 파견한다는 자체가 매우 생소한 일이었다. 미국 주재 공사관에 파견되었던 서기관 이상재가 목도한 현실은 바로 청국과의 외교 문제였다. 청국은 조선의 내치 외교는 조선이 자주한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조선을 청국의 속방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조선이 외교를 하면 늘 간섭하고 방해하였는데, 이러한 사태가 미국에서도 벌어졌다. 청국 공사는 조선 공사가 외국 공사와 만나게 되면 먼저 자신과 상의하도록 요구하였고, 조선 공사가 미국 외무성을 출입할 때에도 항상 청국 공사의 안내를 받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조선 공사 박정양은 청국의 이러한 요구를 모두 거절하고 외국인과 단독으로 만남을 가졌다. 이러한 박정양의 태도에 대하여 서기관 이상재는 자주독립국으로서 외교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는 시간이 되었다.
[월남 이상재의 독립협회와 사회 활동]
이상재가 사회 활동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독립협회 활동으로 인하여 감옥살이를 한 것이다. 1898년 독립협회 부회장으로서 이상재는 민권 운동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상재는 유학적 소양을 갖춘 관료로서가 아니라 백성들을 대변하는 민권 운동가로서의 삶으로 생각을 전환하였다. 한편 기독교라는 서구식 가치관을 수용하면서 그동안 자신이 가지고 있던 유학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삶을 지향하게 되었다. 이상재의 기독교로의 전환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둘째 아들이 고문을 당하면서 감옥살이를 한 일과 이승만이 기독교 서적을 반입하여 정동교회에서 설교한 결과로 보기도 한다. 이상재는 옥중에서 쓴 글에서 인간으로서의 절박한 심정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이상재가 정치적으로 최대의 시련을 겪은 시기는 1902년부터 1904년까지 의금부에 감옥살이를 하면서였다. 이상재는 감옥살이 중에 감옥 안에 설치된 도서실에서 선교사들이 제공하는 여러 서적들을 읽었다. 특히 기독교에 귀의하였던 독립협회 임원들의 영향이 컸는데, 함께한 YMCA 활동이 결국은 이상재의 사회 운동의 터전이 되어 주었다. 이상재는 1905년 YMCA의 2대 교육부 위원장이 되면서 더욱 기독교적인 사회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도 이상재의 이러한 목소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이상재는 일제의 식민 통치에 대한 비평도 서슴지 않았다. 두 사례가 있다. 하나는 1911년 일본시찰단의 일행이 되어 동경 유학생을 초대 강연하는 자리에서였다. 이상재는 강연장에서 큰 소리로 웃다가 울었다고 한다. 이상재는 처음 울면서 공사관에서 일하던 때를 회고하면서 감격하여 울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1919년 3·1운동의 조사를 위하여 파견된 일본 국회의원이 방문하면서 “한일 간은 부부와 같지 않은가?”라고 묻자 이상재는 “두 손을 묶고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냐?”라고 반문하였다고 한다.
[월남 이상재의 서거와 사회장]
이상재는 1927년 3월 30일, 서울의 재동 자택에서 78세로 서거하였다. 이상재의 장례식은 조선인들을 다시 합심하게 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죽어서도 이상재의 삶은 이상재의 삶이 아니었던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이상재를 위한 국장 혹은 국민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회장이 국장과는 차이가 있지만, 식민지 조선이 처한 상황에서 가장 큰 의미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국제적으로 보면 사회장은 국민과 민족을 포함하는 범위에서 진행되는 매우 거국적인 장례식이었다. 식민지 조선의 거인이었던 이상재를 조선인 전체가 하나가 되어 추도하는 민족 단결의 상징과도 같은 사건이 되었다. 이상재의 사회장은 전국의 모든 단체에서 추도식을 거행할 정도로 거국적인 행사로 진행되었다. 청년회, 신문 지국, 기자단, 각종 사회단체 등이 전국 각지에서 연합으로 추도회를 거행하였다. 심지어 간도의 대성중학교에서도 사회단체들이 모여 추도식을 진행하였다. 추도식이 끝난 이후에는 전국 각지에서 사회장을 보기 위하여 상영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상재의 죽음은 식민지 조선을 숙연하게 만들고 이상재의 행적을 높이 평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식민지 시기 이상재의 행적은 개항 이후 굴곡진 이상재의 사유 변화에 기반한 것이었다. 사회 운동 혹은 종교 운동에 국한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척왜양을 주장하던 이상재가 서구 제도를 수용하면서 신앙 체계까지 받아들인 것은 이상재의 사유가 매우 넓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월남 이상재의 시대 인식]
이광수는 이상재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13~14세에 경복궁 중건을, 좌전을 읽으면서 병인양요를, 30세가 넘어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불혹에 청일전쟁을, 러일전쟁과 병합은 이순에 당하였을 것이다.” 이광수는 이상재를 중화 문명이 해체되고, 서구 문명이 들어오고, 일제가 침략을 하는 격변기에 사유 갈등을 하던 인물이라고 본 것이다. 특히 50세가 넘어서 기독교에 귀의한 것은 이제 정치적 한계를 넘어서서 종교적 차원으로 자신을 바꾸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상재의 삶에서 볼 수 있는 이상재의 세계관은 유교적 가치관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정부 관료로 참여하고 외교 활동을 전개하면서 점차 민권에 대한 의식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미국에서의 생활은 큰 계기가 되었다. 이상재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권리를 소유하고 있으며 정부가 기능하지 않으면 논박하고 탄핵하여 권리를 신장하는 것이 옳다.”라는 생각을 지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는 기독교의 수용을 통하여 이상재의 사상은 최종적으로 정립되었다. 감옥에서 영국성공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하늘나라의 영원한 즐거움을 함게 누리면 상제의 널리 사랑하는 인과 예수 그리스도의 널리 구제하는 은총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은가.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라고 썼다. 이상재는 식민지 시기에도 사회 운동에 열중하였다. 정인보가 1929년에 쓴 신도비를 보면 “평생 청빈과 강직함으로 올바른 길을 걷던 인물”이라고 평가하였다. 이상재는 유학에서 기독교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사적 이득이나 외압이 아닌 자신의 학식과 애민을 기본으로 삼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