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의 기틀을 마련하다, 서천 수리조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004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박범

[정의]

충청남도 서천군의 수리조합에 얽힌 이야기.

[서천의 농업 환경]

일제 강점기 서천 지역의 농업 발전은 서천 수리조합의 설립과 맥락을 같이한다. 원래 서천군은 충청남도에서도 작은 지역이었다. 하지만 비옥한 평야가 펼쳐져 있었기 때문에 서천군에서 생산된 미곡은 충청남도 전체 2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그만큼 서천은 농업의 비중이 매우 높은 곳이었다. 조선 총독부는 식민지 초기부터 서천의 미곡 생산 능력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일본으로 수탈하기 위한 거점으로 서천군을 주목하였다.

수리조합 이 건립되기 위하여서는 수자원 확보가 필수였다. 당시 수자원으로 가장 주목을 받은 대상은 저수지와 같은 관개 시설이었다. 서천은 조선 후기 이래 관개 시설이 비교적 매우 발달한 지역 중 하나였다. 18세기 중반 기록에 따르면, 충청도에서 20개 이상의 제언을 보유한 군현 6곳 중 하나로 서천이 언급된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12개의 제언이 서천군에 존재하고 있었다고 보고된 사례가 있다. 1913년 기록에 따르면, 제언은 총 25개소가 있었으며, 아직 수축하여야 할 제언 15개를 제외하고도 10개의 제언이 이미 가동되고 있었다. 수리조합의 설치 공사가 완료된 이후에도 조합 구역 내에는 이미 11개의 제언과 20개의 보가 운영되고 있던 상황을 보면, 수리조합 운영과 재래의 제언 및 보의 이용이 매우 중요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천평야는 일찍이 천수(天水) 의존도가 매우 높았다. 금강 하구에 위치한 관개로 하천과 저수지를 이용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므로 한재와 수해를 입는 사례도 매우 많았다. 1923년 제출된 ‘수리조합 사업 계획서’에서도 그러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수리조합 구역 3,000여 정보 중에서 재래의 제언과 보에 의하여 완전하게 관개가 가능한 토지는 250정보에 불과하였다. 대부분의 지역은 한해를 입기도 하고 수확은 반으로 줄어들거나 전무하는 일도 왕왕 있었다고 한다. 전 지역이 수해를 입는 곳은 많지 않았지만, 길산천판교천의 저습지와 서천면의 서남단 일부에서는 대체로 수해를 자주 입었다고 평가하였다. 즉, 서천 지역의 농경지는 상당수가 천수답으로 운영된 셈이다. 이러한 사실은 재래의 수리 시설이 노후화되어 기능이 저하되었지만, 서천의 자연 지리적 이점으로 높은 수준의 농업 생산량을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되기도 한다.

재래 수리 시설이 다수 존재하고 있다는 자연 지리적 조건으로 인하여 서천 지역은 일찍부터 수리 사업이 활성화될 수 있었다. 1919년부터 조합 설립이 계획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구체적인 설립 계획은 1920년대 초부터 진행되었고, 위원을 선임하는 과정에서 조선인과 일본인 간의 대립이 발생하였다. 결국 세력 다툼이 커지면서 일시 중지와 재개를 반복하였다. 수리조합의 설립을 둘러싼 분규가 수습된 것은 1923년에 이르러서였다.

[서천 수리조합의 설립 과정]

서천 수리조합은 1922년 10월 설치 인가를 신청하면서 본격적으로 설립을 위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당시 신청 대표자들은 서천 수리조합의 규약과 사업 계획서, 조합에 들어가는 구역과 면적, 토지 소유자들의 동의서를 첨부하여 조선 총독부와 충청남도에 설립 허가 신청을 하였다. 당시 신청서 대표자는 일본인이 많았다. 그중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대전지점장 사카키 미야지가 주목된다. 당시 조합 구역 중 상당수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소유였기 때문에 대표로 대전지점장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그 밖에 강경에 거주하던 아라마키 간지, 군산에 거주하던 요코야마 노리이치, 서천군에 거주하던 가네히라 도라이치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 조합장으로는 가네히라가 임명되었다. 이들은 모두 서천 지역에 매우 많은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였으며, 서천군에 거주하지 않는 일본인도 많았다. 설립 신청자 중에는 한국인 지주도 눈에 띈다. 이상구와 이승휴가 대표적이다. 이상구는 서천공립보통학교[현 서천초등학교]의 교사를 거쳐 서천군청과 청양군청의 직원으로 일한 경력이 있다. 이승휴는 한산군의 향교 전교를 거쳐서 수리조합 건립 때 화양면장을 지낸 인물이다. 모두 화양면의 유지였다.

[서천 수리조합 건립 반대 운동]

수리조합 설립 조건은 조합원으로 등록된 소유자들의 1/2 이상으로, 조합 구역이 될 토지 면적의 2/3 이상의 토지 소유자의 동의를 얻는 것이었다. 조합 구역 내 총 토지 소유자는 1,830명이고, 동의한 자는 1,014명, 반대한 자는 816명이어서 전체의 55%로 절반을 넘었다. 문제는 토지 소유 면적이었다. 동의한 토지 소유자의 토지는 전체 2,305정보로 전체 면적 3,262정보의 2/3를 겨우 넘겼다. 서천 수리조합 설립 과정에서 지역민들의 동의를 충분히 이끌어 내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제 강점기 수리조합의 설립 과정은 지역의 이해관계와는 무관하게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여러 곳에서 ‘수리조합 설립 반대 운동’이 전개되었다. 서천 수리조합도 설립 과정에서 반대 운동이 거세게 진행되었다.

당시 서천 지역민들이 서천 수리조합 설립을 반대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수리조합이 쓸모없다는 주장이다. 서천 지역은 이미 수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에 굳이 수리조합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수리조합의 설립으로 수혜 지역이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수혜 지역과 피해 지역이 비슷하며, 오히려 수리 공사로 인하여 침수되는 가옥이 발생하고 지역민이 도리어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서천 지역에는 제언이 41개나 존재하며 보도 다수 축조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 설립 과정이 불법적이라는 주장이다. 수리조합의 설립 과정에서부터 일본인 지주가 다수 참여하고 있으며, 조선 총독부와 충청남도의 주도로 동의를 요구받았다는 것이다. 반대 운동 당시 가장 큰 원인이기도 하였다. 서천 수리조합의 경우 조합에서 동의서를 날인하는 과정에서 불법과 기만으로 동의서를 작성하였다는 것이다. 셋째, 조합비가 너무 많다는 주장이다. 수리조합 설립 초기에는 수세가 2~3원이라고 선전하면서 동의서를 이끌어 냈다. 그러나 서천 수리조합의 규약을 보면, 이익을 보는 정도에 따라 7등급으로 구분하여 조합비를 부과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특히, 수리조합의 설립 과정에서 불필요한 지역까지 수리조합 구역에 편입되면서 부당하게 조합비를 납부하여야 하였기 때문에 지역민들의 반발이 컸다.

[서천 수리조합의 인가와 공사 진행]

수리조합 설립 과정에서 조합 구역 내 농민이 아니라 조합장으로 선정된 가네히라와 아라마키 같은 일본인 지주와 소수의 한국인 지주에게 유리하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수리조합 평의원으로 선정된 한국인 지주도 이러한 사실을 뒤늦게 알고 제외되기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수리조합 설치로 피해를 본 주민들이 연명으로 날인한 탄원서가 작성되었다. 주민 대표로 나석주, 조남천, 고광규 등이 충청남도청과 조선 총독부를 방문하고 철회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충청남도 내무과장과 조선 총독부 사회과장은 이미 허가한 것은 취소할 수 없다고 반려하였다. 또한, 서천경찰서에서는 농민의 항의에 맞서서 한국인이 두 사람 이상 모이면 해산하라는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하였다.

공사가 진행된 것은 1924년부터였다. 그런데 1924년에는 서천 지역에 극심한 가뭄이 찾아왔다. 조선 총독부는 당시 가뭄으로 인한 이재민을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도리어 공사의 추진을 강행하였다. 공사는 일본인 고데라구미에게 청부를 받아 진행하였다. 실적이 미흡한 한국인 노동자에게는 품삯을 삭감하기도 하였다. 나중에는 중국인 노동자로 대체하기도 하였다. 서천군 마산면에 있는 신장저수지 공사에서는 부근 주민들이 임금을 받지 못하였다고 하여 서천경찰서에 찾아가 항의하기도 하였다.

서천 수리조합은 2년간의 공사를 완료하고, 준공 예정일인 1926년 4월 29일에 맞추어 준비되었다. 하지만 순종이 1926년 4월 25일 승하하면서 결국 준공식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1926년 6월 24일과 25일 종천면 석촌리에 있던 흥림저수지에서 수리조합 준공식이 거행되었다. 서천 수리조합은 1923년 4월 조선 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서천면, 종천면, 서남면, 마동면, 화양면, 기산면의 몽리 구역을 정하고, 관개 면적은 3,500여 정보, 조합원은 2,229명에 이르는 대규모 수리조합이었다. 서천 수리조합의 중요 수리 시설은 봉선저수지와 흥림저수지였다. 봉선저수지는 나중에 동부저수지로, 흥림저수지는 서부저수지로 이름이 바뀌었다. 사업비 179만 원으로 1924년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결국 총공사비는 181만 원에 이르렀으며, 1926년 3월 완공하였다. 준공식에는 조선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와 충청남도지사 및 지역 유지들이 참여하였다.

수리조합 의 설립으로 많은 마을이 사라지게 되었다. 동부저수지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마산면 소야리·벽오리·삼월리·신봉리 일부와 시초면 봉선리 일부가 수몰되었다. 수몰된 마을 30여 가구의 100명이 강제 이주되었다. 서부저수지의 조성으로 종천면 지석리·석촌리·흥림리 일부와, 판교면 등고리·동지리 일부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서천 수리조합의 운영에 대한 불만]

서천 수리조합은 서천 지역의 논농사 지대에 풍부한 농업용수를 공급함으로써 서천의 농경 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농업용수의 공급이 원활하게 진행된 것만은 아니다. 수리조합 완공 이후 가장 큰 가뭄이 들었던 1928년 여름에는 조합원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였다. 1928년 8월, 조합원 50여 명이 각각 진정서를 작성하여 수리조합에 제출하였다. 조합원들의 불만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저수지는 가뭄이 들었을 때 필요한 것이지만, 올해는 가뭄에 용수 공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합비를 낼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다. 둘째, 동부저수지서부저수지에 비하여 규모가 큰데 저수를 잘못하여 오히려 용수는 더 부족하다는 주장이다. 셋째, 미야자키 농장과 같은 일본인 농장은 조합비를 납부하지 않아도 막대한 용수를 지급받는다는 주장이다. 결국 조합원들은 수리조합의 운영에 불만을 제기한 것이다. 직무 불충분, 차별적 태도, 급수의 불공평이 진정의 주된 내용이었다.

[서천 수리조합의 성과]

서천 수리조합 사업은 산미 증식 계획의 일환으로 진행되었으며, 그 목표인 고수확의 달성을 이루었다. 조합비의 부과는 예상 수확량을 고려하여 이를 초과하는가에 달려 있다. 당시 예상 수확량은 단보당 3.08석이었다. 사업 이전에는 평균 수확량이 1.8석이었으나 서천 수리조합은 평균 수확 3.36석을 달성하였다. 특히, 서천 지역의 증산 실적은 대규모 수해가 발생하였음에도 평균 이상의 안정적인 목표를 달성하였다. 서천 수리조합의 성과는 첫째, 수리조합 이후 수리 개선의 효과가 두드러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수리조합의 관개 시설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둘째, 토지 개량 사업에서 농사 개량 사업으로 사업의 내용이 변경되었다. 농사 개량 대책, 즉 지료를 많이 투입하여 농업 생산량이 높아졌다. 수리 개선의 효과는 종자의 갱신, 비료의 투입, 경종법의 개선으로 이어져 농법 개량이 활발하게 시도되었다. 또한, 두 번에 걸쳐 사업 내용이 개정되었다. 농업 지도원의 설치, 파종답과 모범답의 설치, 자급 비료의 장려, 묘대(苗垈) 개량의 장려, 비료와 농구의 공동 구입을 추가하였고, 이후에는 미곡 경작의 장려, 병충해의 구제 및 예방의 장려, 경종법 개선의 장려, 미곡의 건조 및 조제 개선의 장려가 사업의 주된 내용이었다. 이러한 요인으로 서천 지역의 농업은 서천 수리조합을 중심으로 근대적인 방식의 새로운 농업 지대로 거듭나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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