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의 교육을 위하여 헌신하다, 서천 이하복 고택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002
이칭/별칭 서천 이하복 가옥,청암 이하복 고택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기산면 신막로57번길 32-3[신산리 120]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이경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4년 12월 24일 - 서천 이하복 고택 국가민속문화재 제197호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서천 이하복 고택 국가민속문화재로 변경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4년 5월 17일 - 서천 이하복 고택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변경
현 소재지 서천 이하복 고택 - 충청남도 서천군 기산면 신막로57번길 32-3[신산리 120]지도보기

[정의]

충청남도 서천군 기산면 신산리에 있는 이하복 고택에 대한 이야기.

[개설]

서천 이하복 고택(舒川 李夏馥 古宅)한산 이씨 출신 인물인 청암(靑菴) 이하복(李夏馥)[1911~1987]이 거주하였던 공간이다. 서천 이하복 고택은 전통 시대 농촌 사회의 전형적인 주거 공간의 형태를 보존하고 있어 문화적 가치가 높다. 또한, 이하복은 일제 강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천 지역의 교육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였던 인물이다. 지역 사회의 발전과 교육 수준 향상을 위하여 노력하였던 인물의 생애가 담겨 있다는 점에서 서천 이하복 고택은 역사적 의미가 큰 공간이다.

[청암 이하복의 교육 활동]

이하복 가계가 서천군 기산면 신산리 일대로 이주하게 된 배경은 이하복의 고조할아버지가 서천군 신산리에 입향하면서부터였다. 처음 입향하였던 19세기 중반에는 신산리에 있는 기존 가옥에 거주하였는데, 이하복의 증조할아버지 이병직(李昺稙)이 고택 부지를 마련하여 안채 3칸의 전퇴집을 건립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중·보수를 거치며 현재의 고택이 되었고, 이하복은 고택에서 성장하며 교육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28년 한산공립보통학교[현 한산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934년 경성제1고등보통학교[현재 경기중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1939년 와세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하복은 경성제1고등보통학교에 재학하던 시절 김동환, 송진우 등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러한 일은 와세다대학교 졸업 후 이하복이 문화 운동을 통한 항일 운동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조선에 귀국하여 손진태의 추천으로 1939년부터 1943년까지 4년간 보성전문학교[현재 고려대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하였다. 보성전문학교에서 이하복은 동양경제사를 가르쳤고, 창씨개명에 반대하였다. 이하복은 1944년 일제의 학생 강제 징용에 반발하여 학병 입대 권유를 거부하고 고향이었던 서천군으로 낙향하여 농촌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하복의 농촌 계몽 운동은 농촌 조합 활동과 서천 지역의 교육 발전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농촌 조합 활동은 근로 협동체였던 가마니조합을 조직하여 농촌 생활 개선에 힘썼는데, 농한기에 가마니를 짜서 판매한 후 기금을 조성하고 생활 필수품을 구매하였다. 1946년 동강고등공민학교(東崗高等公民學校)를 설립하였다. ‘동강’이라는 이름은 이하복이 자신의 조부 이형규의 호였던 동암(東菴)의 ‘동’ 자와 아버지 이응구의 호 운강(雲崗)의 ‘강’ 자를 따서 지은 것이었다. 이후 1949년 12월 30일 학교법인 동강학원(東崗學院)을 설립한 후 동강중학교(東崗中學校)를 건립하여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동강중학교는 ‘교육보국(敎育報國) 교이제민(敎而濟民)’의 이념에 따라 서천 지역의 교육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이하복은 사후 1994년 교육 사업에 이바지하고 국가와 지역 사회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이 추서되었다.

2003년 이하복의 정신을 계승하는 차원에서 이하복의 큰아들 이기원을 중심으로 자녀들이 청암문화재단(靑巖文化財團)을 설립하였다. 청암문화재단은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 가며 서천 이하복 고택을 관리하는 한편 향토 문화의 존속 및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서천 이하복 고택의 탄생과 변천]

이하복의 증조할아버지 이병직이 19세기 후반에 현재 위치에 안채 3칸을 건축하였던 것에서부터 서천 이하복 고택이 시작되었다. 이후 이병직의 아들 이형규가 가옥의 안채 3칸집에 사랑채, 아래채, 채를 신설하였고, 안채의 좌우측을 증축하였다. 이후 1994년부터 고택에 대한 보수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가장 먼저 사랑채와 행랑채가 보수되었고, 광채, 안채, 사랑채, 헛청의 초가 이엉이 보수되었다. 구체적인 공사 내용은 문간채는 기초 및 기단 공사, 자연석 굴뚝 설치 공사이고, 행랑채는 미장 공사, 초가 담장 설치 공사였다. 1995년 안채와 광채가 보수되었고, 1999년 사랑채와 행랑채 산자 이상 해체 보수가 이루어졌다. 2009년부터는 매년 주기적으로 초가 이엉 잇기가 진행되었다. 2018년에는 이하복 고택에 소장되었던 각종 생활용품과 유물들을 전시한 이하복 고택 전시관이 개관되었다.

서천 이하복 고택은 1984년 12월 24일 국가민속문화재 제197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국가민속문화재로 변경되었다. 2024년 5월 17일 국가유산청의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에 따라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바뀌었다.

[서천 이하복 고택의 구조]

서천 이하복 고택은 중부 지역 전통 농촌 가옥의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 서천 이하복 고택의 구조물은 안채, 사랑채, 아래채[행랑채], 위채[서재], 부속 건축물로 구성되어 있다. 구체적인 공간은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몸채 공간과 아래채와 위채, 바깥광채가 있는 부속 공간으로 나뉘며, 전면에는 사랑채와 안채 2개의 건물이 나란히 평행 축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몸채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앞쪽에 사랑채를 가로로 놓여 있고, 뒤쪽에는 안채가 있다. 뒤쪽의 ‘ㄱ’자형의 6칸 안채와 앞쪽에 대문간이 있는 ‘一’자형의 사랑채, 그리고 안채의 측면 왼쪽에 안광채가 있어 튼‘□’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부속 공간은 사랑채의 오른쪽에는 2칸 정도 떨어져서 ‘一’자형의 아래채가 설치되어 있다. 바깥마당을 중심으로 앞쪽에 아래채와 더불어 뒤로 ‘一’자형의 위채, 그리고 바깥광채가 돌출되지 않아서 가운데 마당을 둔 폐쇄적인 공간이 있다.

안채는 19세기 후반 처음 건립되었고, 20세기 초반에 좌우측이 증축되었다. 안채는 ‘ㄱ’자형의 평면을 갖는데 정면 6칸 반, 측면 1칸 반 장방형 건물로 긴 변을 남향에 면한 전퇴집이고, 우측단부에서 사랑채 쪽으로 1칸 증설한 평면 구조이다. 1994년 초가 이엉 보수, 1995년 안채 보수 등 수차례 초가 이엉 잇기 보수 공사가 시행되었다. 기단은 사면 모두 자연석으로 막돌 허튼층쌓기인데, 모든 기단은 두벌대로 자연석 막돌로 바른층쌓기를 하였다.

사랑채는 19세기 후반 서천 이하복 고택이 처음 건립될 당시에는 없었으며, 20세기 초반에 증축될 때 처음 설치되었다. 사랑채는 ‘一’자형의 평면을 갖는데 정면 4칸, 측면 1칸 반 장방형 건물로 긴 변을 남향에 면하게 한 전퇴집의 평면 구조이다. 1994년 초가 이엉 보수, 1999년 지붕 보수 공사가 있었는데, 특히 1999년에는 산자까지 해체한 후 초가 이엉 잇기 공사가 진행되었다. 이후 수차례 초가 이엉 보수가 있었고, 2015년 구들 및 아궁이 보수 공사가 시행되었다. 모든 기단은 외벌대, 두벌대로 자연석 막돌을 바른층쌓기를 하였다.

아래채[행랑채]는 사랑채와 마찬가지로 19세기 후반 고택이 건립될 당시에는 없었으며, 20세기 초반에 증축 공사를 통하여 설치되었다. 아래채는 ‘一’자형의 평면을 갖는데 정면 5칸 반, 측면 1칸 반 장방형 건물로 긴 변을 남향에 면한 전퇴집의 평면 구조이다. 1994년 보수 공사가 시행되었다. 기단은 사면에 설치되는데, 모두 외벌대, 두벌대로 자연석 막돌을 바른층쌓기를 하였다.

위채는 화재로 20세기 초기 최초 건립한 건물이 소실되어 이후에 재건되었다. 위채는 ‘一’자형의 평면을 갖는데 정면 4칸 반, 측면 1칸 반 장방형 건물로 긴 변을 남향에 면한 전퇴집의 평면 구조이다. 모든 기단은 두벌대로 지연석 막돌을 바른층쌓기를 하였다.

부속 건축물로는 바깥광채, 안광채, 대문간, 헛간채[디딜방앗간], 화장실 등이 있다. 바깥광채는 위채의 좌측부에 안광채와 같이 주 축선을 동서 방향으로 두고 있다. 바깥광채의 기단은 외벌대에서 세벌대의 자연석 막돌로 설치한 기단이다. 안광채는 고택의 좌측부에 설치되어 있는데 건물의 주축 방향인 남북축선이 아닌 직교축으로 동서 방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안광채의 기단은 지형에 따라 기단 높이가 다른데, 전면에서 두벌대에서 네벌대 자연석 막돌로 설치한 기단이다.

[서천 이하복 고택의 소장 유물과 전시관 개관]

서천 이하복 고택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보수하는 과정에서 고택 소장의 다양한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이하복 고택에 소장된 서적류는 모두 3,625종 7,835권이며, 공예품은 총 423품목 1,043점이다. 소장되었던 서적류는 인문 사회 과학 분야의 서적을 망라하였는데, 시기별로는 전근대 시기 한장본(漢裝本)부터 20세기 양장본까지 다양하였다. 특히 한국 출판문화사상 매우 중요한 희귀본들이 적지 않았으며, 뿐만 아니라 191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일본에서 간행된 인문 사회 분야의 명저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전시용 서적류는 227종 1,153권으로 분류되었다. 전시용 서적류의 출판 형태별 구체적 현황을 정리하면 필사본 47종, 48권, 한장본 및 고전 영인본 98종, 958권, 철필[가리방] 2종, 2권, 양장본 78종, 143권, 기타[서한 및 문서] 2종 2권이다.

공예품은 농기구, 도구 등과 같은 생업 도구와 서재, 부엌 용품의 비율이 높게 나타났으며, 축음기와 서양 악기인 크로마하프, 아코디언 등 근대 문물도 다수 있다. 서천 이하복 고택에서 소장한 각종 공예품의 특징으로는 공예품의 품목과 종류가 소박한 점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이하복 가계가 절용 정신을 바탕으로 경제 생활을 영위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전시용 공예품은 164품목 304점이다. 전시용 공예품의 유물 성격별 구체적 현황을 정리하면 생업 도구 114점, 서재용 82점, 부엌용 47점, 안방용 25점, 의례용 22점, 기타 14점이다.

서천 이하복 고택에서 발굴된 각종 유물들은 고택 옆에 있는 이하복 고택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하복 고택 전시관은 서천군 첫 공립 박물관으로 이하복 고택의 유물들을 관리 및 전시할 목적으로 2018년 11월 8일 개관하였다. 전시관 내부에는 청화백자모란문호[20세기 초], 놋수로[20세기 중] 등 유물 1,476점이 전시되어 있고, 희귀본으로 알려진 조선 시대의 목은연보(牧隱年譜)도 소장되어 있으며, 아울러 영상실, 체험 공간 등도 갖추어져 있다.

[청암 이하복과 서천 이하복 고택의 의미]

이하복의 생애와 고택은 여러 측면에서 의미가 깊다. 먼저 서천 지역의 유력 문중이었던 한산 이씨 출신 이하복이 지역 발전과 교육을 위하여 헌신하였던 사실이 현대 사회의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된다는 점이다. 특히 이하복은 와세다대학교에서 유학하고 보성전문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하면서 꾸준히 항일 운동을 하였으며, 일제의 창씨개명과 강제 징용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고향으로 낙향한 후에는 농촌 계몽 운동에 앞장서서 지역 사회의 발전을 도모하였고, 학교를 설립하여 후학 양성에 힘썼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이하복의 생애는 많은 이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고택은 이하복의 증조할아버지 대부터 내려와 이하복의 자녀들까지 총 5대가 거주하였던 공간으로 전통적 가치가 클 뿐 아니라 초가집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중부 지방의 전형적인 농촌 가옥이라는 점에서 문화적 가치가 높다. 고택에서 발굴된 각종 생활용품은 이하복의 절약 정신을 보여 주는 한편 구한말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농촌 사회의 현실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특히 이하복은 초가집이었던 자신의 고택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다는 지인들의 염려에 “쌓아 놓은 책이 버텨 주어 무너질 수 없다.”라고 답변하였다 하는데, 이하복의 말을 증명할 만큼 고택에는 많은 양의 책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하복의 생애와 고택은 근현대 지식인의 생활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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