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남산성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521
한자 舒川南山城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서천읍 남산리 산22-1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최병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3년 - 서천남산성 발굴 조사
문화재 지정 일시 1995년 3월 6일연표보기 - 서천남산성 충청남도 기념물 제96호 지정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6년 - 서천남산성 발굴 조사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서천남산성 충청남도 기념물로 변경 지정
현 소재지 서천남산성 - 충청남도 서천군 서천읍 남산리 산22-1지도보기
성격 산성
양식 테뫼식 석축산성
크기(높이,길이,둘레) 약 146m[높이]|620m[둘레]
소유자 서천군
관리자 서천군

[정의]

충청남도 서천군 서천읍 남산리에 있는 산성.

[개설]

서천남산성(舒川南山城)충청남도 서천군 서천읍 소재지와 금강 하구 사이에 형성된 나지막한 야산성 구릉 지대에 있다. 주변으로는 서쪽과 남쪽으로 굽이지는 해안과 하구가 접하고, 동쪽과 북쪽은 서천군을 가로지르는 판교천길산천 변의 넓은 충적지가 마주한다. 따라서 산 위에서는 주변의 넓은 충적 대지와 함께 서해안 및 금강 하구까지 한눈에 모두 관망이 가능하다. 또한 주변으로 취락에 유리한 환경이다.

[문헌 기록]

서천남산성에 대하여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이 나오는데, ‘고읍성 재령취산정 석축주일천오백사십오척 내유일정 세종시이기지기측조절 이우금치 기하문유고읍기지(古邑城 在靈鷲山頂 石築周一千五百四十五尺 內有一井 世宗時以其地奇側阻絶 移于今治 其下文有古邑其地)’라고 하여 남산이 영취산으로 지칭되었고 세종 때까지 고읍성으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위치]

서천남산성충청남도 서천군 서천읍 남산리 산22-1에 있다. 서천군의 남쪽에 높게 솟아 있는 남산에 있다.

[형태]

서천남산성은 산 정상부[높이 146m]를 감싸는 둘레 620m의 테뫼식 석축산성(石築山城)이다. 남산성은 정상부의 평탄한 지형을 따라 평면 긴 타원형으로 축성하였고, 성벽은 경사면을 이용하여 편축(片築)과 협축(夾築)을 겸용하여 축성하였다. 성내에는 정상부 암반 지대를 기초하여 높게 형성된 평탄한 고대지(高臺地)가 있고, 성벽과 고대지 사이에는 평탄지가 다수 확인된다. 또한 산성의 북쪽 골짜기에는 집수지(集水池)가 있으며, 치(雉) 2개소도 확인되고 있다. 출입 시설로는 서문지와 동문지 2개소가 확인된다. 서문지는 남산성 서쪽에 회전하는 부분에 있으며, 동문지는 산성 동남쪽 능선 사면에 축조되었다. 서문지에 대하여 두 차례의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는데, 조사 결과 문지는 최소한 세 차례 이상의 개축이 이루어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최초의 문지는 평면 ‘八’자형으로 문 앞쪽의 성벽을 둥글게 돌려 쌓았고 너비도 5.85m 이상으로 넓었으나, 2차 개축 이후에는 너비를 2.7m 정도로 좁히고 축조 기법도 조악하여지는 양상을 보였다. 성벽은 방어에 취약한 동쪽과 서쪽 능선부는 협축하여 높게 쌓고, 북쪽과 남쪽의 급경사면은 안에서 쌓아 올려 토층을 다짐하고 외면에 석축을 부가한 편축 방식이 확인되었다. 성벽 기저부 너비는 7m 정도이고, 높이는 7m를 넘는 규모로 파악된다.

서문지 및 성 내부 건물터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다량의 기와편과 생활 용기편들이 크게 3개의 층위로 노출되었다. 남산성의 주된 사용 시기에 해당하는 두 번째 층에서는 ‘설림(舌林)’ 또는 ‘서림군(西林郡)’이라는 명문와가 다수 출토되었다. 문헌에 의하면 ‘설림’과 ‘서림’은 오늘날 서천의 옛 지명인데, 백제 설림군이 통일 신라 시대인 757년(경덕왕 16) 서림군으로 변경되었고, 조선 전기 서천군으로 변경되었다.

[현황]

서천남산성은 1993년과 2006년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1995년 3월 6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96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충청남도 기념물로 변경되었다.

[의의와 평가]

서천남산성은 조선 전기 왜구 침탈에 대비하여 현재의 서천읍성으로 치소를 옮기기 전까지 서천군의 행정 중심지로서 기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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