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5004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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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長巖鎭城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장암리 176-2 일원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최병화 |
조성|건립 시기/일시 | 1514년 - 장암진성 성벽 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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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5년 - 장암진성 지표 조사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6년 - 장암진성 남문지 및 남벽 발굴 조사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19년 - 장암진성 발굴 조사 |
현 소재지 | 장암진성 -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장암리 산1-1![]() |
성격 | 산성 |
양식 | 삼태기식 |
크기(높이,길이,둘레) | 45m[높이]|660m[둘레] |
[정의]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장암리에 있는 고려 시대 및 조선 시대 추정 석축 진성.
[개설]
장암진성(長巖鎭城)은 금강 하구에 있는 구릉성 야산 지대에 있다. 서해안과 금강을 드나드는 출입구 주변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곳이며 유사시 신속한 이동으로 공격과 방어가 가능한 요충지이다. 장암리 앞뜰은 오래전부터 기벌포, 지화포, 손량, 장암포, 서천포, 백강진포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이 중 기벌포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기록에 따른 삼국 시대 말 당나라 13만 대군의 백제 침공 진입로로 비정되어, 오래전부터 학자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왔다. 이처럼 고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오랫동안 전략적인 요충지로 여겨져 왔다.
[건립 경위]
장암진성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등을 보면, 고려 시대부터 존재하였던 수군진으로 장암진으로 불리었다. 조선 시대에는 서천포영으로 불리었으며, 1514년(중종 9) 석축 성벽을 축성한 것으로 전한다.
[위치]
장암진성은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장암리 산1-1 일원에 있다. 서천군 서남단에 있는 후망산[높이 90m]에서 남서쪽으로 길게 뻗어 나온 궁계산 끝에 있다.
[형태]
장암진성 성벽은 능선 정상부[높이 45m]와 서쪽 사면을 크게 감싸는 둘레 660m의 삼태기식이며, 남벽 일부는 평지에 걸쳐 있어 산성보다는 평지성에 가깝다.
[현황]
장암진성은 1995년 지표 조사가 실시되고 1996년 남문지 및 남벽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으며 2019년 성내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2024년부터 연속적인 조사가 계획되어 있다. 성벽은 외면을 석축하고, 흙다짐하는 내탁식으로 축성되었다. 남벽은 정상부를 포함한 경사면 상단부를 풍화암반토가 드러나도록 단면 L자로 굴착하였다. 그리고 마사토와 점토를 이용하여 충진한 뒤 기초석을 올려놓았다. 기초석 뒷면은 뻘흙과 점토를 섞어 채웠다.
기초석 위쪽으로는 점점 작은 돌을 올리며 쌓아 올렸으며, 면석 뒤쪽으로는 일정 부분 할석으로 채움하였다. 그리고 상면에 흙으로 내탁하면서 단면 삼각형에 가깝게 형성하였다. 면석은 크기와 모양이 일정하지 않다. 성돌과 성돌 사이의 빈틈에는 작은 할석을 끼워 넣었다. 북벽은 외벽은 기반토 또는 기반암까지 굴착 후, 흑갈색 다짐층 또는 적갈색 다짐층 상면에 지대석을 놓고 면석을 올리거나, 기반암 위에 잡석지정을 하고 면석을 바로 올렸다. 내벽은 뒤채움돌을 누층 형식으로 쌓고 뒤채움토는 수평 또는 사선으로 다짐하였다. 뒤채움토 중간에는 내부 석축이 전체적으로 확인된다.
서벽은 지대석과 뒤채움돌만이 확인되며, 지형상 바닷물이 유입되었던 지역으로 지반이 약한 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말뚝지정, 잡석지정을 하여 지반을 강화하였다. 또한, 상부의 하중을 지지하기 위하여 북벽보다는 대형의 지대석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남문지는 주춧돌과 문루를 시설하기 위한 석축단의 기초 시설만이 확인되었다. 주춧돌은 중심 거리가 235㎝이며, 석축단은 동서 730㎝, 남북 350㎝이다. 주춧돌의 좌우측 전면에는 남북 330㎝, 동서 195㎝의 평면 공간이 있는데 홍예기석을 놓았던 시설로 추정된다. 그러나 석축단 기초 시설의 북쪽에는 이러한 시설이 없어 뒷면은 평거식으로 판단된다. 남문지는 토층 조사를 통하여 적어도 세 번에 걸친 개보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초축 주춧돌은 이미 기능을 상실하여 확인되지 않는다. 북문지는 후대에 교란되어 구체적인 양상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주변에서 확인된 옹성의 경우 내벽은 점토와 석재, 기와 등을 이용한 기반 다짐층 위에 소형의 지대석을 놓고 면석을 축조한 반면에 외벽은 흑갈색 점토다짐층 상면에 대형의 지대석을 놓고 면석을 올렸다.
성내에서는 건물터 5동, 지상 건물터 1기, 석렬 유구 4기, 소성 유구 1기, 우물터 3기, 구덩이 50기, 도랑 유구 7기, 기둥 구멍 80기 등이 확인되었고, 이외에도 제철 유구 2기를 비롯하여 토광묘 1기 등 다수의 유구가 조사되었다. 유물은 고려 시대 토기편과 조선 시대 백자편, 기와편이 수습되었다. 남문지와 남벽에서 출토한 기와는 생선뼈무늬와 화문의 복합문, 청해파문이 중심을 이룬다.
[의의와 평가]
장암진성 내 건물터는 고지도(古地圖)와 비교하여 볼 때 1~3건물터는 고래 시설과 주변에 소성 유구 및 목탄층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실생활과 관련된 유구인 내아(內衙)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2·3건물터가 있는 제2평탄 대지는 동헌(東軒)·객사(客舍)가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5건물터는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남쪽에 단독으로 있어 군기고(軍器庫)로 추정할 수 있다. 발굴 조사를 통하여 본 장암진성의 주 운영 시기는 16세기로 판단되며, 건물지의 소실 후 다시 대지 조성을 하고 17~18세기에 재차 운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주변에서 확인되는 2구역의 제철 유구와 부속 시설로 추정되는 수혈 등은 15세기 정도에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장암진성의 조성 연대는 단언할 수 없다. 발굴 조사 결과를 통하여 고려 및 조선 시대 흔적이 확인되었지만 장암진성이 있는 곳은 삼국 시대부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감안한다면 보다 이른 시기의 관련 유적이 존재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