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5004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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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國債報償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서천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헌주 |
[정의]
1907년 충청남도 서천 지역에서 국민들의 모금으로 나라 빚을 갚고자 일어난 국권 수호 운동.
[배경]
1904년 8월 제1차 한일 협약을 맺은 이후 일본은 화폐 정리 및 시설 개선 등을 명목으로 대한 제국이 일본으로부터 거액의 차관을 들여오게 하였다. 일본의 계획에는 대한 제국을 경제적으로 일본에 예속시켜 식민지화를 공고화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1907년 일본으로부터 들여온 차관의 총액은 대한 제국의 1년 예산과 비슷한 수준인 1300만 원이었다. 1907년 1월 대구의 광문사에서 대동광문회로 개칭하기 위한 회의가 진행되었을 때, 광문사의 사장 김광제(金光濟)와 부사장 서상돈(徐相敦)이 국채 1300만 원을 갚지 못한다면 앞으로 나라를 팔아서라도 갚아야 하는 상황이니 우리 동포가 담배를 석 달만 피우지 말고 담뱃값을 모아 국채를 갚자는 제안을 하면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시작되었다. 서천 지역에서도 국채보상기성회를 주도한 김성희(金成喜)의 활약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었다.
[전개]
김성희는 1893년 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를 시작으로 홍주부주사, 경북관찰부주사, 중추원의관 등을 역임하였다. 1907년 학성덕어학교[독일어]부교관으로 근무하고, 5월 한성사범학교 교관으로 근무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기호흥학회에서 활동하면서 근대 교육과 관련한 30편 이상의 글을 투고하기도 하였던 계몽 운동가였다. 김성희를 중심으로 서천 지역에서는 1907년 3월 중순 한산군주사 노재민(盧載民)·홍준유(洪俊裕), 세무주사 김상익(金商翊), 비인군주사 조돈승(曹敦承)·윤영기(尹永基), 서천군의 김병혁(金柄赫)·김기청(金箕靑)과 상규단(商規團) 두령 안백삼(安伯三)·김문보(金文甫)·홍구익(洪久益) 등이 호서국채보상기성의무사(湖西國債報償期成義務社)를 발기하고 취지서를 발표하며 활동이 이어졌다. 그러한 결과 신화폐로 10원을 거두는 성과가 있었지만 서천 지역 국채보상운동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였다.
[결과와 영향]
국채보상운동 은 전국적으로 벌어진 국권 회복 운동으로 서천 지역 사람들도 적극 참여하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