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500020 |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서천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명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866년 - 이동백 출생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872년 - 김창룡 출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33년 - 국창 이동백·김창룡 조선성악연구회 창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43년 - 김창룡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49년 - 이동백 사망 |
출생지 | 도만리 - 충청남도 서천군 종천면 도만리![]() |
출생지 | 성주리 -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성주리![]() |
[정의]
충청남도 서천군 출신의 판소리 명창 이동백과 김창룡에 대한 이야기.
[개설]
충청남도 서천군은 중고제(中高制) 판소리가 융성하였던 지역이며, 현재 중고제 판소리의 전승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판소리 명창 중에는 이동백(李東伯)[1866~1949], 김창룡(金昌龍)[1872~1942] 등과 같이 서천군 출신이 많다. 서천의 소리를 노래한 국창(國唱) 이동백과 김창룡의 삶을 통하여 서천군의 판소리 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왕의 총애를 받은 이동백]
이동백은 충청남도 비인군 이방면 도만리[현 충청남도 서천군 종천면 도만리]에서 태어나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쳐 활동한 판소리 명창이며, 한국 근대 5명창에 속하는 인물이다. 이동백은 13세 때 중고제 명창 김정근(金定根)[?~?]의 문하에 들어가 판소리를 공부하고, 김세종(金世宗)[1825~1898]의 문하에 들어가 5년간의 배움 끝에 소리를 완성하였다. 20세 전후 충청남도 서천군 종천면 도만리의 희리산(希夷山) 용구(龍口)에서 2년간 독공을 하여 득음을 하였다고 전하여지며, 다시 경상남도 진주시의 이곡사(里谷寺)에 들어가 3년간 공부하였다. 절에서 나온 뒤, 창원부사의 부름을 받고 경상남도 창원시에 내려가 「새타령」을 불러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이동백의 「새타령」은 이날치(李捺治)[1820~1892]의 「새타령」 이후 첫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새타령」의 최고 권위자라고 평가받는다.
이동백은 36세 이후 경상남도 창원에서 9년간 활동하며 명창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고, 46세 무렵 서울로 올라가 김창환(金昌煥)[1848~1939], 송만갑(宋萬甲)[1865~1939]과 원각사(圓覺社)에서 창극 공연을 하였다. 원각사가 해산된 이후에는 연흥사(延興社), 광무대(光武臺) 등에서 송만갑과 함께 창극 공연을 이어 나갔다. 1933년 송만갑, 정정렬(丁貞烈)[1876~1938], 김창룡 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를 조직하여 판소리 교육에 힘썼고, 창극 정립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고종(高宗)의 총애를 받아 어전 광대로 활동하며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벼슬을 받았고, 판소리를 좋아하던 순종(純宗)이 전화기에 귀를 대고 듣던 소리가 이동백의 소리라는 유명한 일화가 전하여진다. ‘근대 5명창’ 중에서 국민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 송만갑이라면, 왕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이동백이라 전하여진다. 이동백의 소리는 통성과 미성을 기본으로 하는 호령조로 웅장하고 씩씩한 소리였다. 단단하고 풍부한 성량을 가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1939년 부민관(府民館)에서 은퇴 공연을 열자, 열화와 같은 요청으로 두 달 동안이나 전국과 만주, 연해주 일대까지 순회공연을 하였다.
이동백의 제자 중 강장원(姜章沅)[1909~1962]이 이동백의 소리를 일부 이어받았으나 병사하여 맥이 끊겼다. 이동백의 소리는 최조의 창극 음반인 「춘향전 전집」[일축고선소리반(日蓄朝鮮歌盤), 1926]을 비롯하여 「새타령」, 단가 「백발가」, 「춘향가」 중 「이별가」, 「심청가」 중 「심봉사 눈 뜨는 대목」 등을 유성기 음반으로 남겼다.
[이동백 소리의 특징]
판소리 이론가 신재효(申在孝)[1812-1884]의 「광대가(廣大歌)」에 나오는 광대의 조건 네 가지[인물치레, 사설치레, 득음, 너름새]를 모두 충족하는 사람이 바로 이동백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동백은 풍채가 당당하여 성량이 뛰어나고, 용모가 수려하였으며, 연기력과 표현력도 풍부하였다. 성음(聲音)은 매우 미려하고 하성(下聲)의 웅장함은 당시 비할 자가 없었고, 한 옥타브 이상의 넓은 음역대, 새소리, 귀곡성(鬼哭聲) 등을 표현하는 부분도 탁월하다. 특히 독창성과 즉흥성이 뛰어난 명창으로 평가된다. 이영민(李榮珉)[1881~1962]은 이동백의 풍부한 성량을 중국 장시성에 있는 여산폭포(廬山瀑布)[루산폭포]의 세찬 물결에 비유하였으며, 이러한 이동백의 소리는 「새타령」과 「흥보가」 중 「제비 후리려 나가는 대목」, 「춘향가」 중 「어사출도」, 「심청가」 중 「범피중류」에서 더욱 빛을 발하였다.
[판소리 명창 가문에 우뚝 선 김창룡]
김창룡은 서천 횡산리[현 서천군 장항읍 성주리]에서 태어났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쳐 활동한 판소리 명창이며, 한국 ‘근대 5명창’에 속하는 인물이다. 김창룡은 세습 예인 집안 출신이다. 판소리 명창 김성옥(金成玉)[1801~1834]의 손자이고, 판소리 명창 김정근의 아들이다. 판소리 명창 김창진(金昌鎭)[1875~?]의 형이며, 판소리를 하였던 김세준(金世俊)의 아버지이자, 김차돈[본명 김선초]의 할아버지이다.
김창룡은 7세 때 아버지인 김정근에게 판소리를 배우고, 이후 동편제(東便制) 명창인 이날치에게 1년간 판소리를 배웠다. 그 뒤 오랫동안 홀로 판소리를 공부하다가 30세 무렵 서울로 올라와 연흥사 창립에 공헌하였고, 협률사(協律社)를 조직하였으며, 1933년 송만갑, 이동백, 정정렬 등과 조선성악연구회를 조직하여 창극의 보급과 후진을 양성하는 일에 힘을 썼다. 경성구파배우조합, 조선음악협회, 조선음률협회, 조선성악연구회 등 다양한 단체에서 주요한 임무를 맡아 창극 공연을 주도하고, 공연 및 라디오 방송에도 자주 출연하였다.
김창룡은 30대부터 서울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 왔으나 음반 취입은 비교적 늦은 54세에 시작하였다. 단가 「추월강산」과 「대장부한」, 「춘향가」 중 「사벽도 사설」과 「기생점고」, 「심청가」 중 「곽씨부인 유언 대목」과 「심봉사 탄식가」 등을 유성기 음반으로 남겼다.
중고제 이전의 고제(古制) 소리에도 매우 능숙하였던 김창룡은 옛 명창들의 고제 더늠을 음반으로 남기기도 하였다. 「춘향가」 중 고수관(高壽寬) 더늠 「자진사랑가」와 염계달(廉季達) 더늠 「돈타령」, 「흥보가」 중 권삼득(權三得) 더늠 「놀보, 제비 몰러 나가는 대목」과 송광록(宋光祿) 더늠 「범피중류」 등을 녹음하였다. 63세에는 「콜럼비아 춘향전 전집」, 64세에 「폴리돌 심청전 전집」과 「폴리돌 화용도 전집」 창극 음반 취입에도 참여하였다. 김창룡은 가문의 소리를 중심으로 자신의 소리를 확립하여 중고제의 소리를 이어 오고 있었으나, 전승되지 못하고 중고제의 맥이 끊겼다. 이후 김창룡은 1943년 사망하였다.
[김창룡 소리의 특징]
김창룡은 타고난 성대가 좋아 며칠 동안 소리를 계속하여도 상하지 않았으며, 성음이 매우 우렁차고 꿋꿋하였다. 소리를 길게 뻗어 내어 고졸한 느낌을 주었으며, 남도 특유의 계면조(界面調) 선율은 비교적 적게 사용하였다. 대신 비성, 시성 뒤집는 목 등 다양한 목으로 감정을 적절히 표현하였다. 이영민의 「벽소시고(碧笑詩稿)」를 보면 “김창룡의 소리에 대하여 한번 소리하매, 맑기가 옥퉁소를 부는 듯하다.”라고 하였다. 김창룡의 소리가 청아하고 맑아서 마음을 울리는 소리를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창룡은 특히 「적벽가(赤壁歌)」 중의 「삼고초려(三顧草廬)」와 「심청가」 중의 「꽃타령」 등을 잘 불렀다고 전하여진다.